“프로에겐 자극을, 입문자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우리 같은 늦깎이 아마추어 연주자들의 가장 큰 보람입니다.”
흔히 특정한 일로 밥벌이를 하는 프로에 견주어, 아마추어의 존재 가치를 말할 때는 ‘열정’과 ‘순수성’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추어에 대한 칭찬에서 보통 실력은 논외다.
그러나 실력과 기예(技藝)에선 뒤쳐질 수 있어도 아마추어는 전통과 관습에 덜 얽매일 수 있다는 점에서 프로보다 자유롭다. 프로에겐 어느 순간 당연한 일상이 되어버린 영역이 아마추어 시선에서 보면 ‘의아함 투성이’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금 연주 4년차인 8명의 회원으로 이뤄진 심향회(沁響會)는 바로 이렇게 프로들이 하지 못했던 접근법을 통해 ‘아마추어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이들의 모임이다. 그간 구두로만 전수되던 연주 중심의 대금 공부에 의문을 제기하고, 초보자 관점에서 이론적으로 정리하는 책을 펴내는 등 이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대금을 세상에 알리고 있다.
10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서울시50플러스 중부캠퍼스에서 만난 오승준(64) 심향회 회장의 과거는 사실 국악과는 거의 접점을 찾을 수 없던 삶이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오씨는 1982년부터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우간다ㆍ인도네시아ㆍ캄보디아 등 해외 곳곳을 돌았다. 미국 시카고에서 받은 석사학위 역시 미국문학일 정도로 오씨의 일생은 서구 문화와 더 익숙했다.
그러나 그런 경력의 오씨가 1990년대부터 국악에 심취하게 된 것 또한 주요 근무지가 해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씨는 “외교관 생활 중 매년 연말 연회를 할 때 각 나라 사람들이 저마다 자국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곤 했다”며 “그런데도 한국 사람들은 오히려 서양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고 국악에 관심을 가진 계기를 회상했다. 그는 “국악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것이야말로 해외에 한국을 알리는 외교관의 책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국악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 오씨의 해외 생활은 더욱 풍성해진 느낌이었다고 한다. 오씨는 "서양음악처럼 화음이 아니라, 선율을 타고 흐르는 국악이 인생의 여유와 자유를 만끽하게끔 해주는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대금 소리를 들었을 때 그 선율이 온몸에 스며들었다”며 “그래서 이번 대금 연주자들의 모임 이름도 소리가 스며든다는 의미를 지닌 ‘심향회’로 짓게 됐다”고 말했다.
오씨는 공직 은퇴 후 대금 연주를 배우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제대로 대금을 배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반인들에게 국악 연주를 가르치는 곳은 없다’거나 ‘대금은 지공(손가락으로 막아 음의 높낮이를 내는 구멍)간 간격이 넓어 손 힘이 약한 노년층은 결코 배우지 못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단다.
난관에 부딪쳤던 대금 학습 기회는 뜻밖에 서울시50플러스 중부캠퍼스에서 찾아왔다. 2017년 3월 50대 이상의 중ㆍ노년층을 대상으로 열린 대금 연주지도 수업에서 오씨는 김영헌 국립국악원 대금연주자에게 연주 지도를 받게 됐다. 당시 함께 수업을 들었던 이들과 의기투합해서 만든 것이 지금의 심향회다. 교직에서 한문을 가르쳤던 소시영(65)씨는 “심향회를 결성한 후 매주 국립국악원 대금 악장과 연주가를 초빙해 그룹지도를 받았다”면서 “같은 연배 사람들끼리 모이니 대금에 대한 애착뿐 아니라 서로에 대한 연대까지 형성됐다”고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외교관, 은행원, 서예가, 화학ㆍ한문 선생님 등 심향회 회원들은 저마다 다른 삶의 궤적을 살아왔지만, 대금을 향한 열정이라는 공감대 위에서 평생 지기처럼 의기투합했다. 이장근(71)씨는 “처음에는 지공간의 간격이 좁은 플라스틱 대금으로 가르침을 받았다”면서 “여섯 달 정도가 지나 소리를 부는 것이 익숙해질 즈음, 대나무 대금에 입김을 불었는데, 그 때의 울림은 황홀 그 자체였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남들보다 뒤늦게, 그리고 어렵게 시작한 심향회의 ‘사서 고생’은 그들이 스스로 세상에 없던 대금 교본을 만드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유점상(65)씨는 “연주 중심으로 이뤄진 대금 공부는 구두로만 전수되는 것이 보편적이라 현장에서 배울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면서 “이런 아쉬움을 고려해 매 수업 때마다 배운 내용을 메모하고, 회원들이 함께 당시 학습과정을 논의해 교재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초보자를 위한 대금 이야기’다. 이 교본을 통해 심향회 회원들은 자신들의 나이와 신체능력 등 한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초보자들도 끊임없이 보고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국립국악원 대금 연주자의 감수를 받아, △호흡법 △입모양 만드는 법 △소리 내는 법 △자세 잡는 법 등 대금 공부를 처음 접하는 초심자들의 입장에서 글을 썼다. 정순환(73)씨는 “구전으로만 내려오던 대금교본을 만든 것뿐 아니라 대금 연주의 접근성을 향상시켜 국악의 대중화에 이바지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심향회 회원들은 교본 제작에 머물지 않고 소년원, 고아원, 양로원, 교회 등 여러 기관을 방문해 대금의 즐거움을 알리는 일을 계속할 계획이다. 유명숙(61)씨는 “코로나19 탓에 일부 공연이 무산되기는 했지만, 지금도 꾸준히 연습하면서 공연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아마추어의 마음을 아는 ‘아마추어 고수’들은 다른 이들의 가슴에도 대금 소리가 스며드는 그 순간을 느끼게 해 주고 싶단다. 그래서 오늘도 가슴에 스며들 '그 음' 하나를 갈고 닦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