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 보유국들이 핵무기 현대화를 지속하고 있는 게 이번 연례보고서의 핵심이다."
스웨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지난달 15일(현지시간) 발간한 2020년 연감에서 "전 세계 핵탄두 수는 감소했지만 위협은 더 커졌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대표적인 핵무기 현대화의 사례로 미 해군이 지난해 말 트라이던트-Ⅱ형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에 탑재한 저위력 핵탄두 W76-2를 언급했다.
미국은 1978년 개발한 100킬로톤의 고위력 탄두 W76-0형, 2008년에 이를 90킬로톤으로 감소시킨 W76-1형에 이어 2018년에 다시 5~7킬로톤까지 줄인 저위력 W76-2형 핵탄두를 개발했다. 1킬로톤은 트라이나이트로톨루엔(TNT) 폭약 1,000톤이 폭발하는 위력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위력이 15∼20킬로톤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는 2018년 '핵 태세 검토 보고서(NPR)'에서 W76-2 등 저위력 핵무기의 개발을 예고했고, 지난해 말 대서양에 배치된 전략 핵잠수함 '테네시(SSBN-734)'의 탑재 미사일 24기 가운데 몇 기에 W76-2를 장착했다. 미 국방부는 이 같은 W76-2 실전배치 사실을 올해 초 공개하면서 "러시아 억제 차원에서 소규모 핵무기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핵보유 강대국인 미국과 러시아 모두 핵무기 감축과는 별개로, 기존의 핵무기와 생산 시설의 현대화ㆍ개량화 사업에 거액을 투입하고 있다. 미국은 기존 핵탄두를 새로운 설계로 개량하고 있고 핵탄두 탑재 폭격기와 잠수함,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량하고 있다.
러시아는 핵이 장착될 수 있는 극초음파 무기 개발에 대해 공공연히 언급해 왔고, 핵탄두를 장착한 핵추진 무인잠수함(수중 드론) '스테이터스-6(Status-6)'와 같은 새로운 무기 개발에도 힘써 왔다. 러시아 정부는 지난달 2일에는 핵무기 사용의 근거가 되는 '위험한 상황'이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기술된 '핵억지력 분야 국가정책 원칙'도 승인했다. 잠재적인 적이 우주공간에 미사일방어(MD) 수단이나 공격 시스템을 구축ㆍ배치하는 상황, 비핵국가 영토에 핵무기나 운반 수단이 배치되는 상황 등을 핵무기 사용 근거로 규정한 것이다.
양대 핵 강대국의 이 같은 움직임은 군비통제협정이 잇따라 결렬된 배경과 관련이 깊다. 특히 미국의 소규모 핵무기 개발 추진은 미러 양국이 냉전시대에 체결한 중거리핵전력조약(INF) 폐기를 추진하는 가운데 나왔다. 러시아가 미국의 폐기 발표 전에 INF를 교묘한 방법으로 어겼다는 게 미국의 주장이다. 이에 지난해 8월 미국 주도로 INF가 공식 폐기됐고, 지난 5월 미국은 항공자유화조약(Open Skies TreatyㆍOST)에서도 탈퇴 의사를 밝혔다.
이제 러시아와 미국의 마지막 주요 무기통제협정은 내년 2월 만료를 앞둔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ㆍ뉴스타트)'이다. 지난달 22일부터 양일간 오스트리아 빈에서 만나 첫 연장 협상을 가진 마셜 빌링슬리 미 군축담당 특사와 세르게이 랴브코프 러시아 외무차관은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일정을 마무리했다.
협정은 양국의 이견이 없는 한 5년간 연장되지만, 미국은 중국까지 포함한 새 협정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의 핵능력이 높아져 위협 요소로 부상한 만큼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지만, 중국은 핵전력이 미러와 동등하다고 볼 수 없는 만큼 군비통제의 규정을 적용받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W76-2는 미국의 핵전력 현대화뿐 아니라 고조돼 가는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국면과 관련해서도 주목해야 할 무기다. 경우에 따라 북핵 억지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미 과학자연맹(FAS)에서 핵정보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한스 크리스텐슨 소장은 올해 초 미 국방부가 W76-2 실전배치 사실을 공개할 당시 "W76-2에 대한 거의 모든 논의가 러시아 시나리오에 집중돼 있지만 새로운 저위력 핵무기는 북한이나 이란에 대한 핵무기 사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평가했다.
최근 미 조지타운대 국제안보연구소의 키어 리버 교수는 실질적인 북핵 억지 방안을 묻는 미국의소리(VOA) 방송의 질문에 "때로는 덜 파괴적인 위협이 더 파괴적인 위협보다 믿을 만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 핵을 억제하는데 전통적 고위력 핵무기보다 저위력 핵무기가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저위력 핵무기는 정확도가 높고 부수적 피해가 훨씬 적어 미국이 실제로 쓸 수 있는 핵무기라는 점에서 북한의 핵도발에 상당한 억지력을 발휘할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W76-2는 6,000개 이상으로 알려진 북한의 지하시설 파괴에 효과적이다. 지휘부의 지하벙커도 파괴할 수 있다. 저위력 핵무기는 전략핵무기에 탑재됨으로써 지역적 억지능력을 높인다. 트라이던트-Ⅱ는 미국의 대표적인 전략핵무기로 그동안 100킬로톤 위력의 W76과 W76-1, 그리고 475킬로톤 위력의 W88 핵탄두를 수발에서 십여발씩 탑재했다. W76-2 핵탄두의 경우 위력은 5~7킬로톤으로 낮지만 명중률은 상당하다.
엄청난 피해 때문에 실제 사용 가능성이 낮은 전략핵무기 대신 '작은' 핵무기를 배치하면 핵사용의 신뢰성을 높여 억지력을 강화할 수 있다. 전략핵무기의 경우 실제로 이를 사용할 것이라고 상대국이 여기지 않음에 따라 핵사용의 신뢰성은 상대적으로 낮다고 평가된다. 저위력 핵무기는 한 번 사용에 수십만의 희생자를 내는 전략핵무기와 달리 100명 정도의 희생자만 낼 수 있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도 있다.
그런데 사용의 신뢰성을 높인다는 것은, 실제 사용될 수도 있음을 의미해 이 지점에서 논란도 뒤따르고 있다. 미국 저위력 핵무기의 상대는 중국ㆍ러시아ㆍ북한의 핵무기이다. 미국과 이들 국가들은 남중국해ㆍ대만해협ㆍ서해 등에서 충돌할 가능성이 상존하는 상태다. 만에 하나 충돌이 발생하고 그것이 격화되면 작은 핵무기가 사용되지 말란 법이 없다.
특히 북한에 대해서는 국지적일지라도 전쟁이 발발할 경우 미국은 도시를 초토화할 전략핵무기 대신 벙커나 핵시설을 겨냥한 저위력 핵무기를 '실제 사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미국의 군비통제조약 이탈과 저위력 핵무기 개발은 사우디아라비아ㆍ호주ㆍ인도네시아ㆍ한국ㆍ일본ㆍ터키ㆍ브라질 등이 핵무기 클럽에 가입할 수 있는 문을 열어 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베아트리체 핀 핵무기폐기국제운동(ICAN) 사무총장은 소형 핵무기 사용에 대해 "이는 위험하고 새로운 핵무기 경쟁을 피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날려버리는 행위"라며 "세계적인 핵무기 통제 체제의 붕괴를 완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W76-2의 도입을 놓고 미국 내 반론도 커지는 분위기다. 국방부 관리들은 "새로운 저위력 핵무기가 핵전쟁 문턱을 낮추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일부 군사전문가들은 미국이 저위력 핵탄두를 무기고에 추가하면 핵전쟁 문턱이 낮아질 위험이 높다고 반박한다. 조지 W. 부시 정부의 국무부 관료 출신인 스티븐 파이퍼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정치 전문매체 더힐 기고에서 "적국은 SLBM이 W76-2를 탑재했는지, 아니면 90킬로톤의 폭발력이 있는 W76-1을 탑재했는지를 무기가 터지기 전까지는 식별할 수 없다"며 "어떤 핵무기의 사용이든 가능한 한 문턱을 높게 유지하는 게 미국으로서는 이익"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