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선명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 하나 있다. 이른 아침 부스스 잠에서 깨는데 창틈으로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고 칼로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대파를 다지는 걸까? 누군가 아침 밥상을 준비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보글보글 찌개 끓는 냄새도 있으니……
부모의 학대로 아홉 살 아이가 저 세상으로 떠났다. 한 아이는 계부와 친모의 학대를 피해 4층 베란다를 넘으면서까지 목숨을 걸고 집을 탈출했단다.
아동 학대 뉴스를 TV에서 볼 때마다 난 불 꼬챙이로 지지기라도 한 듯 가슴 한쪽이 아프고 뜨겁다. 그때마다 부지불식간에 어린 시절의 기억을 소환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 팬티만 입고 덜덜 떨며 우물가에 서있어야 했던 일, 술 취한 계모가 죽여 버리겠다며 칼을 들고 쫓아오고 그때마다 엉엉 울며 달아나던 기억,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고장의 어느 공장 이층 바닥에서 잠들다 바퀴벌레 소리에 놀라 깨던 날들……부모에게 버림받은 저 어린 소녀가 이제 어른이 되어 길을 가다가, 친구들과 웃다가, 미래의 가족과 식사를 하다가 부지불식간에 떠올려야 할 기억들이다. 계모, 계부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이건 어리석고 가혹한 부모들 얘기이자 버려진 아이들의 기억에 대한 얘기다.
집밥의 기억은 부인할 수 없을 만치 너무도 선명하건만 요즘 들어 난 이 기억이 가짜라는 심증을 굳혀가고 있다. 예닐곱 살에 부모가 이혼한 후 어린 누이가 이웃집에서 얻어온 밥, 반찬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계모의 학대를 못 이겨 십대 나이에 영원히 집을 가출한 후 혼자 지방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목가적인 기억이 가능하겠는가. 도대체 저 기억은 어디에서 왔을까? 가출 후 공장에서 숙식을 하며 지낼 때 이런저런 상상을 많이 하기는 했다. 슈퍼맨이나 영웅이 되어 나쁜 어른들을 응징한다거나, 지금의 부모가 사실은 가짜이고 언젠가 돈 많은 부모가 나타나 나를 데려가리라는 허망한 동화들……아마도 언젠가 배를 곯고 잠이 들다가 저런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것도 여러 번.
코로나 19 상황이 예상보다 길어지며 아동 학대 사례도 많아지는 모양이다. 어느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올해 초 가정폭력 신고가 5.6% 증가한 반면 아동 학대 신고는 51.3% 폭증했다고 한다. 학교가 문을 닫은 후 친구들과 노는 것도 어려워, 부모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진 탓이다. 접촉 시간이 늘다 보니 아이들 시중드는 것도 고달프고 제멋대로 노는 모습도 영 못마땅할 것이다. 어른들은 왜 자신의 욕망과 후회를 아이들에게 투사하려고 하는 걸까? 왜 아이들의 꿈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자신들의 일그러진 삶을 채워 넣고 싶어 할까? 그 시절 계모한테서 제일 많이 듣던 말이 “너희 새끼들 때문에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이다”였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은 꿈까지 빼앗긴다. 부모가 채우고, 가족이, 친구들이 키워주어야 할 기억을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럼 그 빈자리를 아이들은 거짓 기억으로 채우게 된다. 그나마 난 운이 좋았다. 비록 먼 곳이나마 형, 누나가 있고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나를 찾아오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탈출에 성공한 열 살 소녀는 앞으로 어떤 기억을 쌓아갈까? 부모가 잡혀간 게 자기 탓이라고 자책할까? 엄마, 아빠 말을 잘 들었다면, 자기가 조금만 더 참았다면 다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라며 후회할까? 아니면 부모와 어른들을 저주하며 처절한 복수를 꿈꾸게 될까? 어느 쪽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둘 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버려진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 소녀의 기억도 기억의 부재, 또는 조작된 기억으로 채워지리라.
그 소녀의 기억이, 비록 거짓일지라도, 따뜻한 집밥처럼 부디 따뜻한 이야기들로 가득해지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