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까지 확대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안이 13일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상법 개정안은 소액 주주의 권익 보호가 핵심으로, 진보 진영이 요구해온 경제민주화 대표 정책으로 꼽힌다. 정치권 일각에선 조기 대선을 앞두고 야권이 1,500만 개미 투자자 표심을 겨냥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더불어민주당은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주가가 실제보다 낮게 책정)를 해소할 시발점"이라고 역설했지만, 재계는 "소송 남발 탓에 경영 활동이 위축될 우려가 있다"며 반발했다. 국민의힘은 즉각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건의하겠다고 맞서면서 상법개정안을 둘러싼 여야 대치는 가팔라질 전망이다.
상법개정안은 이날 본회의에 3주 만에 다시 등장했다. 지난달 27일 야당이 본회의 통과를 밀어붙이려 하자, 우원식 국회의장은 "여야 간 이견이 너무 커 교섭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한 차례 미루며 협상을 독려했다. 하지만 여야가 접점을 찾지 못하자 우 의장은 이날 끝내 법안을 상정했고, 개정안은 재석 279명 가운데 찬성 185인, 반대 91인, 기권 3명으로 가결됐다. 부결을 당론으로 정한 국민의힘은 반대 또는 기권표를 던졌다. 법안 처리를 주도한 진성준 민주당 정책위의장이 표결기 조작 지체로 기권으로 처리되자 뒤늦게 찬성표로 정정을 요청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상법개정안은 윤석열 정부 내내 '뜨거운 감자'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소액 주주 권리 강화에 힘을 실었지만, 정권 출범 이후 외국 투기자본의 표적 가능성 등을 명분으로 재계가 거세게 반발하자 발을 뺐다. 이후 공전을 거듭하던 논의는 지난해 연말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상법개정안 대국민 토론을 제안하면서 급물살을 탔다. 민주당은 당론으로 채택하며 속도전을 폈다.
민주당은 상법개정안이 우리 경제의 체질 개선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입장이다. 소액 주주의 권익을 보호하는 한편 기업 투명성을 확보해 기업 경쟁력을 높이고 경제 활력을 가져올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진 위의장은 이날 정책조정회의에서 "대주주에 집중된 기업 지배 구조를 개선하고 소액 주주 권한을 보호할 것"이라며 "증권 시장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할 시발점이 되리라고 기대한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특히 윤 대통령과 최 권한대행,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 등 여권 인사들이 상법 개정의 필요성을 인정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1월 한국거래소 방문 당시만 해도 "이사회 의사 결정 과정에서 소액 주주의 이익을 책임 있게 반영할 수 있도록 상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히며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검사 시절 '윤석열 사단' 출신이었던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이날 상법 개정안에 대한 여당의 거부권 행사에 대해 "직을 걸고서라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피력한 것 역시 상법개정안의 우호적이었던 정권 내 흐름을 반영한다. 이 원장이 "주주가치 제고와 관련한 논의를 원점으로 돌리는 형태의 의사결정은 저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며 상법개정안 수호 의지를 드러내자 여권에선 반발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경영권 침해 소지를 이유로 반대 입장을 밝혀온 국민의힘은 "반(反)시장적 법안"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날 "상법 개정으로 대한민국 기업이 글로벌 기업사냥꾼 표적이 될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주가가 떨어졌다는 이유로 경영진이 각종 소송에 휘말리기 시작하면 기업 경영을 상당히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다. 여당과 정부는 대신 2,400여 개 상장 법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대안으로 내놓고 있다.
김대식 원내수석대변인은 "기업들이 단기 성과 압박과 소송 리스크에 시달리게 되는 상황을 만들면서도 민주당은 이를 실용적 입법이라 포장하고 있다"며 야당의 일방 처리를 비판했다. 국민의힘은 최 권한대행에게 재의요구권 행사를 건의할 방침이다.
이날 민주당은 당초 예고했던 김건희 여사 의혹 규명을 위한 상설특검법안은 추진하지 않았다. 반도체특별법 등에 대한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 지정 안건도 올리지 않았다. 초읽기에 들어간 윤 대통령 파면에 당력을 집중하겠다는 판단에서다. 여야가 평행선을 달리는 연금개혁과 추가경정예산안 처리도 진전이 없는 상태다. 우 의장은 이날 여야 합의로 처리 예정이었던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구성'마저 불발되자 "미세하고 비본질적인 결의안 문구 하나로 처리가 불발됐다"며 "여야 합의의 이행이 이렇게까지 진통을 겪는 상황이 매우 유감스럽고 안타깝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