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들판에 바람이 일었다. 바닥에 들러붙은 눈가루가 흩날리며 회오리를 일으킨다. 공기마저 동결돼 금학산(947m)과 그 아래 드넓게 펼쳐진 철원평야가 시리도록 선명하다. 중무장을 했지만 차에서 내리자마자 칼바람이 볼을 때린다. 날을 잘못 잡았구나 싶었다. 올겨울 최강 한파가 닥친 지난 9일 오전 11시, 날씨 앱에 표시된 철원 동송읍 기온은 영하 13도, 체감기온은 영하 18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서 철원이고 그래야 겨울이다. 한탄강 얼음트레킹은 이런 날이 지속돼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3시간가량 얼음 위를 걷고 나면 남은 겨울을 넘기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철원군은 한탄강에 트레킹 코스를 개설하고 ‘물윗길’이라 이름했다. 직탕폭포에서 순담까지 약 8.5km 구간에 부교를 설치하고 얼어붙은 강 위로 걸을 수 있게 했다. 19일까지 이 구간에서 한탄강 얼음트레킹 축제가 진행되고 있다.
은하수교 주차장에 차를 대고 다리를 건넜다. 바람 끝이 매서웠지만 강물이 꽁꽁 얼었을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다리 아래 여울에 물소리가 요란하고, 햇살 비친 수면이 은빛으로 반짝인다.
다리 건너 횃불전망대에 올랐다. 전망대는 철원의 역사를 현대 공학으로 구현했다고 자랑한다. 45m 높이는 1945년 광복을 상징하고, 횃불 조형물까지 포함한 전체 높이 53m는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을 의미한다.
엘리베이터로 전망대 꼭대기에 오르면 철원의 지형이 한눈에 파악된다. 금학산 아래 눈 덮인 평야가 고요하다. 그사이로 한탄강이 굵은 붓으로 그은 듯 부드럽게 곡선을 그린다. 한탄강은 북한 평강군에서 발원해 강원 철원, 경기 포천과 연천을 거쳐 임진강과 합류한다. 약 54~12만 년 전 화산 폭발로 형성된 용암대지를 파고 들며 협곡을 이뤄 현무암 절벽, 주상절리와 폭포 등 독특한 지형과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물윗길 트레킹은 상류부터 태봉대교, 은하수교, 승일교, 고석정, 순담 매표소 다섯 곳에서 들어갈 수 있다. 입장료 1만 원 중 5,000원은 철원상품권으로 되돌려준다. 횃불전망대에서 내려와 물윗길로 들어섰다. 강물이 잠시 속도를 늦추며 넓은 물웅덩이를 형성한 곳, 송대소다. 얼어붙은 수면에 눈이 하얗게 쌓였고 가운데를 가로질러 부교가 설치돼 있다. 햇살 머금은 절벽엔 오각, 육각 주상절리가 반짝거린다.
송대소를 지난 강물은 은하수교 아래 경사를 굽이친다. 바위 위로 미끄러지는 물소리가 협곡에 청량하게 울려 퍼진다. 좌우 절벽과 강가의 검은 바위와 하얗게 쌓인 눈이 선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사납게 평원을 휩쓸던 바람은 협곡의 존재를 모르고 그대로 통과한다. 햇살이 들이치는 물윗길이 이상하리만치 평온하고 따사롭다. 군데군데 강물을 퍼올리는 양수장이 보인다. 철원평야에 물을 대기 위한 시설이다. 큰 여울, 한탄강은 철원 사람들에게 없어서 안 될 생명의 물줄기다.
운동장처럼 넓다는 마당바위를 지나 강기슭에 올라서니 임시 매점이 보인다. 설설 끓는 솥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의 유혹을 물리치기 어렵다. 따끈한 어묵 국물로 얼었던 속을 녹인다. 승일교 부근은 얼음트레킹 축제의 중심이다. 산자락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렸고, 강가에는 대형 눈 조각, 눈썰매장, 얼음놀이터와 겨울 음식 체험장이 조성됐다. 18일에는 특별 이벤트 ‘똥바람 알통 구보대회’가 예정돼 있다. 연중 가장 추운 1월 중순, 낮 기온도 영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철원이기에 즐길 수 있는 축제다.
승일교에서 고석정에 이르는 물살은 은하수교 아래보다 훨씬 거칠다. 강 한가운데에 10m 높이로 솟은 고석과 고석정은 철원에서 가장 유서 깊은 명소다. 조선시대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신라 진평왕과 고려 충숙왕이 머물렀다고 기록돼 있고, 고려시대 여러 시문에도 고석정의 흔적이 남아 있다. 물윗길은 고석정에서 그윽하게 바라보기만 했던 고석 바로 옆을 지난다. 층층이 기묘하게 쌓인 바위와 사이사이에 뿌리 내린 소나무까지 세세하게 관찰할 수 있다.
고석정에서 순담에 이르는 구간은 물윗길 중에서도 경치가 가장 빼어나다고 평가된다. 강 양쪽으로 일부러 깎아놓은 듯 수직 절벽이 웅장하고, 그사이를 흐르는 강물은 유난히 순하다. 순담 부근에 이르면 물윗길에서만 볼 수 있는 바위 비경이 이어진다. 화강암과 현무암이 섞인 거대한 바위 군상이 밀가루 반죽처럼 휘어지고, 곧장이라도 떨어져 내릴 듯 위태롭게 쌓여 있다.
맑은 물과 어우러진 비경은 협곡 언덕에서도 도드라졌던 모양이다. 순담은 조선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 순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가 요양을 위해 찾았다고 한다. 김관주는 이곳에 연못을 조성하고 제천 의림지에서 순채를 옮겨다 심어 순담(蓴潭)이라 불렀다. 약 3시간, 강추위도 잠재우는 절경을 즐겼다.
북한과 맞닿은 철원은 개별적으로 이동할 수 없는 지역이 많다. 동송읍 양지리 DMZ두루미평화타운에서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서 철원의 자연과 역사를 살펴보는 두루미탐조여행, DMZ평화안보관광 2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남북 관계와 날씨의 영향으로 변동성이 많아 당일 현장 접수만 한다.
제2땅굴, 평화전망대, 월정사역을 둘러보는 DMZ평화안보관광은 하루 4회(오전 9시30분, 10시30분, 오후 1시30분, 2시 출발) 운영한다. 출발 15분 전 현장에 도착해 표를 끊고(4,000원) 간단한 안내를 받은 후 개인 차량으로 이동한다. 관광 가이드 차량이 선두에 서고 맨 뒤에는 군용 차량이 따라 붙는다. 이동 중 차를 멈추거나 차에서 내리는 등의 돌발행동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전체 2시간 30분에서 3시간가량 걸린다.
두루미평화타운을 출발한 차량은 곧장 민간인통제초소를 통과해 천천히 제2땅굴로 향한다. 군사분계선에 다가설수록 남북 간 긴장이 점점 실감난다. 도로 양쪽은 철조망으로 둘러져 있고, 멀리 보이던 휴전선 감시초소(GP)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제2땅굴 입구는 남북 군사분계선에서 불과 1.1㎞ 떨어진 산중턱에 있다. 북한군이 그 거리만큼 땅굴을 파고 내려왔다는 의미다. 땅굴은 1973년 11월 20일 청성부대 두 병사가 경계근무 중 지하 폭음을 청취한 것을 계기로 끈질긴 굴착 작업 끝에 1975년 3월 24일 발견됐다. 이때 내부 수색 작전에 투입됐던 7명의 부대원이 북한이 설치해 놓은 지뢰와 부비트랩에 희생됐다.
지하 80~160m의 견고한 화강암층을 뚫은 땅굴은 총연장 3.5㎞에 달한다. 터널 높이는 2m 정도로 유사시 무장 병력이 시간당 1만6,000명 침투할 수 있다고 한다. 입구에서 실제 땅굴까지는 내리막 계단이 이어진다. 우리 군이 굴착작업용으로 판 터널이다. 북한군이 판 땅굴은 약 500m 지점까지 탐방할 수 있다. 50년 세월이 흐르며 내부 암석에는 푸르스름하게 이끼가 끼었고, 곳곳에 고사리가 푸릇푸릇하게 자라고 있다. 언뜻 지하 식물원이 연상된다. 돌아나올 때는 이곳이 남북이 대치하는 최선전이라는 걸 실감한다. 작업 당시 북한군의 굴착기 자국이 단단한 화강암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다음 목적지는 철원평화전망대. 주차장에서 전망대까지는 모노레일(2,000원)을 이용한다. 차츰 고도가 높아지며 동송저수지와 철원평야, 멀리 금학산 산줄기까지 시원하게 조망된다. 눈이 하얗게 덮인 저수지에 겨울 진객 두루미가 떼를 지어 쉬고 있다.
전망대에서는 군사분계선을 가운데 두고 우리 측과 북한군 초소가 두루 조망된다. 비무장지대 원시림 너머로 눈 덮인 북한의 산 능선이 손에 잡힐 듯하다. 설치된 전자망원경으로 보면 인공기가 나부끼는 초소 바깥에서 서성거리는 북한군의 모습까지 관찰된다. 너무나 생생해 오히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이다.
마지막 장소인 월정리역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팻말과 한국전쟁 당시의 객차 잔해가 전시돼 있다. 월정리역은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 철도의 중간쯤 되는 곳이다. 1988년 관광용으로 복원한 역사 옆에 원산 출신 이춘식 시인의 ‘철조망에 걸린 편지’ 시비가 세워져 있다. “꿈에라도 가고 싶은 내 고향 / 내 생전에 못 간다면 아들 손자라도 가게 해야지”. 구절마다 고향을 그리는 절규가 묻어난다.
월정리역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철원의 영화로운 시절이 남아 있다. 텅 빈 벌판에 철원농산물검사소, 제2금융조합건물 등의 건물 뼈대가 고대 유물처럼 서 있다. 허허벌판으로 변해버린 옛 철원 시가지를 통과해 민통선 초소를 빠져나오면 노동당사가 보인다. DMZ평화안보관광은 이곳에서 마무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