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배추 농가가 사라지고 있어요. 배추는 선선한 곳에서 잘 크잖아요. 그래서 강원도의 해발 600m 이상 고랭지에서 생산하는데 그 고지대마저 뜨거워진 거죠. 우리 조합에 배추를 공급하던 강원도 화천의 배추 농가도 생산을 중단했어요."
조합원 25만 명에 이르는 두레소비자생활협동조합(두레생협)의 백형호 상무이사는 요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상 기후로 두레생협의 피해가 막대하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해 배추 농가로부터 공급받기로 약정한 배추를 제대로 받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강원도 홍성의 배추 농가로부터 김장 배추 1,000망(1망당 3, 4포기)을 공급받기로 했지만, 387망만 받았다. 원주 농가에서도 약정한 800망 대신 533망만 받을 수 있었다. 지난해 늦봄부터 시작한 폭염이 이례적으로 장기화하면서 배추 작황이 최악이었던 탓이다.
대규모 반품도 해야 했다. 특히 농가로부터 공급받은 시금치는 이상 고온에 짓무르는 바람에 소비자들에게 내놓을 수 없을 정도였다. 지난해 추석 명절을 맞아 두레생협은 무농약 시금치 3㎏짜리를 130점(832만 원) 입고했지만, 전 검수 과정에서 76점(477만 원)을 반품했다. 반품률이 무려 58.5%에 달했다. 반품이 증가하면 제때 소비자들에게 물건을 내놓기 어렵고 물류비도 상승한다. 생산자도 유통업체도 소비자도 모두 피해를 입는다는 얘기다.
백 이사는 "기후변화로 매년 포탄을 맞는 작물이 꼭 나온다"며 "2, 3년 전에는 참깨였고 지난해에는 잣 생산량이 60% 정도 줄었다"고 소개했다. 현재는 팥 구하기가 힘들어져 시중 붕어빵에 들어간 팥소는 모두 재작년산이라는 것이 백 이사의 설명이다. 그는 "벼농사도 벼멸구 탓에 지난해 수확량이 많이 줄었지만 그나마 비축량이 많은 쌀은 소비자들이 체감하지 못할 뿐"이라며 "채소류는 이상 기후의 직격탄을 맞았다"고 덧붙였다.
우리 먹거리를 향한 기후변화의 위협이 본격화하고 있다. 기온이 뜨거워져 쌀·밀 같은 식량 작물을 비롯해 채소·과수 같은 원예 작물도 생산량이 급감한다. 재배가 가능한 더 서늘한 곳을 찾아 작물들은 북상하고 있지만, 한국인의 주요 먹거리인 빨간 사과나 여름 배추는 더는 우리나라에서 재배가 어려울 거라는 암울한 전망이 나온다. 이는 자연스레 농산물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고, 우리 경제도 휘청일 수밖에 없다.
이상 기후로 먹거리 위기가 올 것이라는 경고음은 수십 년 전부터 지속돼왔다. 최근 들어서는 더 확대되는 추세다. 실제 한국일보가 12일 뉴스 빅데이터 분석시스템인 '빅카인즈(BIGKINDS)'를 이용해 2015년부터 2024년까지 10년간 이상 기후로 인한 물가 관련 언론보도를 분석했더니 이 기간 보도는 12.9배 증가했다. 2015년 52건에 그쳤지만, 지난해 672건까지 늘었다. 지난해 연이은 폭염으로 '금(金)사과', '금(金)배추' 논란에 관련 보도가 쏟아졌다. 검색 대상은 전국 일간지·경제지 25개로 검색 키워드는 △이상 기후 △폭염 △고온 △한파 △물가 등이었다.
보도 추이를 보면 통상 한 해에 100건 안팎의 보도가 나왔다. 그러나 2018년 342건으로 급증하더니 2022년은 483건, 2023년에는 560건을 기록했다. 이상 기후에 대한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는 뜻이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이상 기온은 31.5회, 이상 호우는 44.2회였다. 2018년에는 서울 최고기온이 39.6도, 강원 홍천이 41.0도를 기록하는 등 당시 기상 관측 이래 최악의 폭염을 기록하면서 양배추 가격이 평년보다 181.9% 이상 폭등했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특히 가뭄까지 겹치면서 농작물의 생산량이 급감했고, 농작물의 가을 수확까지 악영향을 미쳤다.
2022년도는 고랭지 배추의 가격 상승이 두드러졌고, 2023년에는 특히 상추 가격이 3배 이상 급등하며 '금(金)추'라는 신종어가 등장했다. 외식업계에선 상추를 대체할 다른 채소를 사용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지난해는 우리나라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후 113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더운 해로 기록됐다. 1~3월부터 평균 기온이 급상승했고, 11월에도 더운 날씨는 특히 지속성 면에서 그 어떤 해와도 비교 불가능한 '최악의 폭염'이었다. 대부분의 작물 생산이 줄어 출시 때마다 가격이 출렁거렸다. 채소류는 물론이고 폭염과 질병에 육류와 어류의 폐사도 잇따랐다.
김성겸 경북대 원예과학과 교수는 "농촌경제연구원이 전년도의 농작물 수요와 공급 모형에 따라 올해 농업 전망을 하는데 기후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농작물의 생산성은 더욱 불확실해지고 있다"며 "수년간 어려운 상황이 반복되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문제는 앞으로 기후변화는 더 악화하는 쪽으로 치달을 거라는 점이다. 고온 현상으로 주요 농산물의 재배적지가 줄어든다는 앞선 전망은 현실로 확인된 지 오래고,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2023년 발간한 '대한민국 기후변화 적응보고서'를 보면 1912년부터 2020년까지 109년간 우리나라 연평균 기온은 1.6도 상승했다. 그러나 이 속도는 더 가팔라져 기후변화 시나리오(SSP5-8.5)를 적용하면 2081~2100년에는 3.3~5.7도 상승할 것으로 예측된다. SSP5-8.5는 화석연료 사용이 높고 도시 위주의 무분별한 개발이 확대될 것으로 가정하는 시나리오다. 농촌진흥청은 연평균 기온이 1도 오를 때 농작물 재배 가능 지역은 81㎞ 북상할 것으로 보고있다.
이 경우 2090년대에는 우리나라에서 여름 배추는 사라진다. 2020년 기준 여름 배추의 재배적지는 1만4,803헥타르(㏊)였지만, 2030년에는 1,261㏊, 2060년에는 44㏊, 2090년대엔 0㏊로 수렴한다. 추운 곳에서 잘 자라는 여름 무도 상황은 비슷하다. 같은 시나리오를 적용하면 2090년 여름 무 재배적지도 0%다.
김 교수는 "여름 배추는 강원도 매봉산 등지에서 6월 중하순 정식을 거쳐 70일 정도 자라 9월 추석쯤 출하한다"며 "지금은 배추 10개 심으면 7, 8개를 상품으로 수확하는데, 요즘엔 날씨가 워낙 더워 썩기도 하고 배추 반쪽이 시드는 병이 생겨 2, 3개밖에 상품화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과일 재배지도 크게 바뀐다. 우리 국민이 즐겨 먹는 사과 역시 2090년에는 우리나라에서 더는 재배가 어려울 것으로 전망됐다. 사과의 재배적지는 4,010㏊ 수준이지만, 2030년 1,081㏊, 2050년 354㏊, 2070년 23㏊, 2090년에는 0㏊로 예측됐다. 배의 재배적지는 2030년대까지는 증가하지만 2050년대부터는 감소해 2090년대에는 거의 없어질 것으로 전망됐다.
한현희 온난화대응연구소 연구관은 "사과는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호냉성 작물이며 배도 비슷한 양상"이라며 "다만 후지 품종인 빨간 사과에 한정한 예측으로 노란 사과는 기후변화에 덜 민감한 만큼 기후변화에 적합한 품종 개발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 기후로 친환경 농사를 포기하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다. 날이 뜨거워지면 벌레가 많이 꼬이는 만큼 농약을 뿌리지 않고서는 농사가 어려운 환경으로 바뀌는 탓이다. 통상 10월 말 11월 초에는 진딧물 피해가 없었지만, 지난해엔 갓과 배추에 진딧물 피해가 심각했다. 친환경농업 인증 농가는 2020년 5만722가구였지만, 2023년 4만9,520가구로 줄었다. 원준희 원주생명농업 부장은 "진딧물 발생 원인을 기후위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며 "친환경은 환경 변화에 취약한데, 결국 포기하는 분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농심(農心)이 꺾이진 않을지 걱정하는 목소리도 크다. 기후변화가 폭염과 열대야, 극한 호우와 폭설, 산불, 꿀벌의 실종 등 다양하고도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 나타나 대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방병섭 두레한강생산자회 국장은 "더위와 폭우 등에 대비해 여러 장치를 달면서 대응해보지만 획기적으로 해결되는 건 없다"며 "생산자들은 돈도 돈이지만 수확이 없어 낙심할 수밖에 없고, 특히 여름 농사를 접는 사람들도 나오고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