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첫 ‘크리스퍼(CRISPR)’ 유전자 가위 신약으로 주목받은 ‘카스제비(미국명 엑사셀)’가 미국에서 올해부터 건강보험이 적용된다. 환자가 부담해야 할 비용이 크게 줄어드는 만큼 활용도가 대폭 커질 전망이다.
유전자 가위 기술은 유전성 희소질환 같은 극소수 환자에게만 제한적으로 쓰일 거란 기존 예상과 달리, 항암제나 장기이식 기술 개발, 동·식물 유전자 편집 등에도 응용되며 시장성이 급격히 확대되고 있다. 특히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상용화의 큰 장벽으로 여겨졌던 특허권 문제가 올해 안에 해소될 가능성이 점쳐지면서 연구개발에 더욱 탄력이 붙을 것으로 보인다. 10년을 끌어온 크리스퍼 특허 국제 분쟁은 반갑게도, 국내 기업에 유리한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다.
미국 공공의료보험 서비스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를 관리하는 기관인 CMS는 카스제비를 개발한 버텍스 파마슈티컬스와 최근 계약을 맺었다. 이 약에 공공보험을 적용해 환자를 우선 치료하고, 추후 효과가 충분히 나타나면 그때 비용을 받기로 했다. 카스제비 가격은 환자당 210만 달러(약 30억 원). 사용에 엄두를 못냈던 환자들이 보험 혜택을 받게 되면 처방 건수가 크게 늘 것으로 전망된다. 이 약의 처방 대상인 겸상적혈구빈혈증 환자는 미국에만 약 10만 명이 있다고 알려졌다. 2023년 12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처음 카스제비를 허가한 뒤 처방 대상으로 추가된 수혈 의존성 베타 지중해 빈혈증 환자까지 포함하면 세계 수요는 3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버텍스는 수요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미국을 시작으로 유럽연합(EU), 영국, 캐나다, 스위스,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등 카스제비를 허가한 국가에 공인치료센터를 건립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45곳이 문을 열었고, 향후 85곳 이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이 센터에서는 환자의 몸에서 조혈모세포를 채취해 적절한 처리 과정을 거친다. 그 세포에 카스제비를 투약한 다음 다시 몸에 주입하면 환자는 영구적으로 병이 치료된다.
버텍스가 대규모 투자를 실행한 이유는 카스제비 사용량이 늘 뿐 아니라, 향후 다른 질환을 치료할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신약이 등장할 가능성 때문이다. 미국 환자 10만 명에게만 카스제비를 판매해도 매출이 300조 원에 이른다는 계산이 나온다. 약값이 떨어져도 수요가 느는 만큼, 후속 신약 개발 속도를 끌어올려 시장을 선점하기에 충분하다는 게 버텍스의 판단으로 보인다.
크리스퍼는 유전자(DNA)에서 원하는 부분을 자유자재로 ‘편집’할 수 있는 유전자 가위 기술의 최신 기법이다. 이 기법의 원천기술 특허권을 둘러싸고 △한국 바이오기업 툴젠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와 오스트리아 빈대로 구성된 CVC그룹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와 하버드대로 구성된 브로드연구소가 10년 가까이 국제 분쟁을 이어왔다. 그중 가장 큰 제약·바이오 시장인 미국 소송이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올 들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약 5년 전 미국 특허심판원(PTAB)은 툴젠을 우선순위 권리자(시니어 파티), CVC그룹과 브로드연구소를 후순위 권리자(주니어 파티)로 분류했다. 툴젠이 먼저 결승전에 올라간 셈이다. 이에 CVC그룹과 브로드연구소가 미국 고등법원에서 ‘준결승’에 해당하는 소송전을 진행해왔는데, 올 상반기 중 최종 결과가 나올 것으로 업계는 전망하고 있다. 여기서의 승자가 툴젠과 결승 소송을 벌이게 되는데, 지금까지 비슷한 소송에서 시니어 파트의 승률이 75%에 달했기 때문에 결승전에서 툴젠의 승리 확률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관건은 2033년 원천기술의 특허가 만료된다는 점이다. 소송 속도를 감안하면 그 전에 3자가 합의할 가능성이 점쳐진다. 소송전 시작 당시와 달리 지금은 카스제비처럼 상용화한 신약도 나온 만큼, 기술료를 누가 얼마나 가져갈지에 대한 합의 절차가 가시화할 수 있는 상황이란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특허 분쟁이 종결 수순을 밟는다면 유전자 가위 기술 산업에는 분명 희소식이다.
크리스퍼는 3세대 유전자 가위로 분류된다. 1, 2세대보다 편집 방법이 간단해 제약뿐 아니라 농업 등 다른 분야에까지 기술의 응용 가능성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에는 정확도와 안전성까지 높이는 4세대 기법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크리스퍼는 유전자를 잘못 편집했을 때 복구가 어려운데, 특수 단백질을 이용하는 4세대 기법은 실패 확률을 줄이면서 속도도 높일 수 있다.
편집한 유전자를 몸에 주입한 뒤 필요한 위치까지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도 진화하고 있다. 지금은 단백질·핵산 복합체, 지질나노입자, 아데노 바이러스 등이 유전자 전달에 쓰인다. 카스제비에는 이 중 단백질·핵산 복합체 기술이 적용됐고, 툴젠도 이와 관련된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전문가들이 유전자 가위가 앞으로 수많은 질병 치료에 적용될 거라고 예상하는 이유는 편집 방식이 다양해 여러 가지로 조합할 수 있어서다. 질환에 맞게 적절한 기법을 효율적으로 설정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든다면 더 많은 유전자 가위 신약 개발이 가능해질 거란 설명이다. 희소한 유전질환이나 암, 당뇨병 등의 기존 약을 개량하는 데도 유전자 가위 기술은 유용할 거란 예상이다.
유전자 가위 기술은 장기이식이나 농축산물 개발에도 쓰이고 있다. 지난해 미국에선 3차례(3, 4, 12월)나 돼지 신장을 사람에게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 실패의 주요 원인이 돼온 면역거부반응 문제를 유전자 편집으로 해소한 것이다. 주로 사람에게 폐렴을 일으키는 유전자 부위를 유전자 가위로 제거했다. 이로써 향후 심장과 간, 피부, 각막 등의 이식 가능성이 열렸다는 전망도 나왔다.
해외에선 유전자 편집 농·축산물이 이미 상용화 단계다. 미국 스타트업 페어와이즈는 2020년 자극적인 맛을 내는 유전자 부위를 크리스퍼 기법으로 제거한 겨잣잎 채소를 개발해 당국의 승인을 받았다. 지난해 미국에선 털이 짧은 소, 영국에선 비타민D가 많은 토마토가 개발됐다. 일본에서도 2021년 스타트업 사나텍시드가 혈압을 낮추는 성분을 4, 5배 더 함유한 토마토를 출시했다. 영국 기업 제너스는 생식기호흡기증후군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도록 유전자 일부를 편집한 돼지를 올해 미 FDA 허가를 거쳐 내년 세계 시장에 출시할 계획이다. 폐사율 60%에 달하는 감염병을 백신이 아닌 유전자 편집 기술로 예방하는 건 축산업의 획기적인 변화다.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편집한 뒤 나타날 영향을 우려하는 시각도 여전히 많다. 다만 외부 유전자를 도입하는 유전자 변형 생물체(GMO)와 달리 유전자 편집 생물체(GEO)는 기존 유전자를 변형한 것이다. 따라서 각국은 GMO와 다른 별도의 GEO 규제를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특허 분쟁 당사자일 만큼 기술 수준이 높은 한국에선 진전이 없다. 김진수 싱가포르국립대 방문교수는 "해외에선 유전자 가위를 활용한 국소적 변화는 규제하지 않거나 GEO로 관리하지만, 한국은 논의도 시작되지 못했다"며 "다양한 부처가 관련된 사안인데도 어느 곳 하나 나서지 않아 국내 기업들은 해외에서 연구와 사업을 펼치고 있다"고 답답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