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혜' 9069일 만에 이름 찾았다..."각본 짠 검경 아무도 사과 안해"

입력
2025.01.0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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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 재심 무죄 김신혜 고향서 인터뷰>
"나는 죄 없어" 노역 거부하고 독방서 25년
동생에 편지 "끝까지 희망 버리지 않을 거야"
검·경 잘못에 꿈 잃은 남매 "이제 다시 시작"

"우와, 구름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구나." "니는 선크림도 안 바르나. 집에 뭐 바를 게 아무것도 없더라." "누나는 내 침대에서 잤잖아. 따뜻하게 잤으면 됐지."

7일 전남 완도군 완도읍 제1부두 앞. 정박한 어선들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에 뭉게뭉게 떠 있는 구름을 손으로 잡아보려던 남매는 이내 투덕거리기 시작했다. 여느 남매처럼 잔소리를 주고받던 이들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짭조름한 바다 내음새를 맡았다. 김신혜(47)가 동생을 쳐다보며 입을 뗐다. "집 생각난다, 그치?"

갑작스러운 집 이야기에 김후성(43)은 말문이 막힌 표정이다. 선착장이 바로 앞에 있어 오가는 배를 볼 수 있던 그 집.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집. 아버지를 잃은 그곳.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는 듯했다. 무슨 대답을 할지 말을 고르던 동생 대신 김신혜가 말을 이어갔다. "주도(완도 인근 작은 무인섬)가 전보다 더 커진 것 같지?" 동생은 그제야 답을 했다. "누나가 너무 오랜만에 와서 그래. 25년 만에 보니까 그렇지." 김신혜의 얼굴에 웃음기에 돌았다. "그런가? 나 좀 꼬집어 봐. 후성아. 이거 꿈 아니지?" 남매는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누군가에겐 지극히 평범한 날이겠지만 이들에게는 24년 10개월(9,069일) 만에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날이었다.

한국일보는 친부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수로 복역하다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자유의 몸이 된 김신혜를 남동생과 함께 고향인 완도에서 만났다. 사법부가 복역 중인 무기수에게 무죄를 선고한 건 헌정 사상 처음이다.

"판사님 목소리로 '무죄' 듣고 싶었어요"

김신혜는 2000년 3월 7일 수면제를 탄 술을 먹여 친부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돼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그는 수감 내내 "나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고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15년이 지난 2015년 11월에 재심 개시 결정이 났다. 검찰이 불복하는 바람에 재심 재판은 2019년 봄에 시작됐다.

후성은 재심이 선고된 6일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전남 해남지원 1호 형사법정 좌석 40개는 평소와 달리 만석이었다. 충혈된 눈으로 법정에 들어선 후성은 의자에 앉지 못하고 박준영 변호사와 법정 뒤쪽에 서있었다. 재판장인 박현수 해남지원장은 피고인 김신혜의 인적사항을 확인한 뒤 사건 개요를 말했다.

오후 2시 7분, 보도자료를 먼저 받은 방청석 앞쪽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고 후성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인 이도 있었다. 첫 장에 적힌 '2015재고합1 재심사건 판결선고' '피고인에 대한 재심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함' 문구를 보고 후성씨는 눈을 질끈 감았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있던 그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후성은 선고 당시를 떠올리며 말했다. "무죄, 진짜 그토록 기다렸던 말이거든요. 근데 안 믿겼어요. 판사님 목소리로 직접 듣고 싶었습니다." 그는 법정 밖으로 나와 기자들에게 "이 판결로 인해 누나가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다"며 어렵게 말을 뱉은 뒤 연신 눈물을 훔쳤다. 건물 뒤로 자리를 옮겨 마스크를 벗자 그의 입에선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으으으윽, 허으으으윽."

후성에게도 24년 10개월은 너무 가혹한 시간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19세 청년에게 누나는 유행하는 휴대폰을 사줄 정도로 친구이자 엄마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누나가 잡혀간 뒤 후성의 20대와 30대는 '살인자 동생'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그는 협박하는 경찰에 못 이겨 누나 집을 들어가 일기장을 가져온 자신을 자책했고, 설마 누나가 아빠한테 그랬을까 잠시 의심도 했다. 홀로 견디기 힘들어 누나와 애써 거리를 두려는 자신을 혐오하기도 했지만 결국 누나를 다시 찾았다. 고교 방송반 반장이었던 후성의 꿈은 방송 엔지니어링 기술자 혹은 카메라 감독이었다. 후성은 열아홉 살부터 마흔세 살까지 누나를 위해 많은 걸 포기했다. 법정을 찾은 동네 사람들은 애타게 누나를 기다리던 후성의 상처 난 마음을 잘 알기에 차마 그의 곁으로 다가서지 못했다.



"188번, 1005번이 아니라 내 이름은 김신혜"

"그렇게 걱정했어? 나는 당연히 나올 줄 알고 있었는데." 동생 얘기를 듣던 김신혜는 빨갛게 부르튼 동생 손을 꼭 쥐었다. 재심 선고 당일 그는 법정에 오지 않았다. 불출석 사유서를 내며 변호인 해임서도 냈다. “11번째 해임이네요.” 멋쩍게 웃으며 입술을 만지던 박준영 변호사는 선고 당일 변호인 자리에 앉지 못했다.

기자가 '왜 해임했냐'고 묻자 "변호사님 어깨가 무거우실 것 같아서 그랬다"는 답이 돌아왔다. 김신혜는 6일 오후 4시가 넘어서야 전남 장흥교도소를 나왔다. '김재훈의 딸 김신혜 무죄'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본 그는 말했다. "잘못된 부분이 있었을 때 바로잡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힘든 일인가. 이렇게 꼭 수십 년이 걸려야 하는 일인가. (아버지) 딸로 살았던 그 세월이 헛되지 않게끔 살겠다." 재심 재판부는 아버지가 김신혜 자매를 성적으로 학대했고, 이 점이 범행 동기가 됐다는 검찰 주장에 대해 근거가 없다고 봤다. 딸을 성추행했다는 누명을 쓰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도 이날 판결로 억울함을 풀게 됐다.

교도소 독방에서 25년 가까이를 보낸 김신혜는 노역도 하지 않고 외부 접촉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신혜는 "어제 감옥에 들어갔다가 오늘 나온 것 같다. 시간이 갑자기 빨리 지나간 것 같다"고 애써 웃었지만, 그가 보낸 고통의 시간은 동생에게 보낸 편지 곳곳에 남아있다. 2001년 3월 19일 후성에게 쓴 편지에는 그의 마음이 응축돼 있었다. "매일 밤 꿈에서 집을 찾아가는데... 우리집에서 후성이랑 친구들이 반갑게 맞아주는데 너무나 기뻐서 깨고 보면 난 여전히 감옥에 갇혀있고... 보고 싶다. 어떻게 되는 걸까? 난 정말 결백하니까... 희망을 버리지 않을 거야."


2004년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쓴 편지에는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손녀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김신혜는 큰 글씨로 "할아버지, 이 사진은 6월 11일 금요일 1면에 나온 사진들인데, 할아버지께서 보시면 좋아하실 것 같아서 보냅니다. 할아버지, 이 족제비 너무 귀엽지요? ...(중략)... 할아버지, 제 일은 잘 될 거니까 걱정 마시고 건강하기만 해주세요. 아셨죠?"라고 꾹꾹 눌러 적었다.

감옥에서 김신혜는 매일 되물었다. 내가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내 존재 이유는 무엇인지.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 '김신혜'를 되찾았다. 그게 가장 가쁘다고 했다. 그동안 그의 이름은 188번(광주교도소), 1005번(청주교도소), 13번(장흥교도소)이었다.


"단 한 사람도 사과하지 않았다"

갇혔을 때와 풀려났을 때 감정을 담담하게 전하던 김신혜와 후성은 수사기관 얘기가 나오자 주먹을 불끈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남매는 한 사람의 인생과 한 가정의 행복을 산산조각 낸 무책임에 분노했다. 후성은 "지금까지 사과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재심 법정에서 만난 경찰들은 우릴 째려보기만 했고, 지금도 잘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

김신혜는 목소리를 더 높였다. 그는 "내 말을 한 번만 믿어주지. 얼마나 억울했는데"라며 "경찰과 검사가 원하는 각본대로 됐다"고 말했다. "조사받으러 갈 때마다 '밖에서 증인이 이렇게 얘기하는데 니가 어떻게 밝힐 거냐. 각본대로 가야 한다'는 얘기를 가장 많이 들었다. 내가 아니면 동생이 뒤집어쓸 수 있다고도 했다."

전국에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7일, 완도에는 눈이 오지 않았다. 하늘은 유난히 푸르렀고 낮게 깔린 구름은 손을 뻗으면 잡힐 듯했다. 김신혜는 팔을 좌우로 뻗어봤다. 손을 가로막는 창살이 느껴지지 않자, 그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 "꿈이 아니네." 후성도 그 손을 잡았다. "누나 이제 시작이야. 걱정은 나한테 주고 누나는 이제 아무 걱정 말고 행복하게 살아."

25년 전 김신혜는 혼자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완도 상화식당 주인 정연(78)씨는 "신혜가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다. 앞으로 기쁜 일만 있을 거여. 힘들면 바로 말혀"라고 위로했고, 그의 고교 친구도 퇴근 후 찾아와 손을 꼭 잡았다. '낙동강살인사건' '화성연쇄살인사건' 범인으로 몰려 옥살이를 했다가 재심으로 풀려난 장동익(67)과 윤성여(57)도 "축하한다. 잘 일어설 수 있다"며 그의 곁을 지켰다. 김신혜는 사람 냄새가 그리운 듯 기자와 헤어지면서 여러 번 말했다. "다음에 꼭 놀러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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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장흥= 조소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