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삭은 흙벽에 매달려/ 찬바람에 물기 죄다 지우고/ 배배 말라가면서/ 그저, 한겨울 따뜻한 죽 한 그릇 될 수 있다면.”
시인 윤중호가 유언처럼 쓴 시 ‘시래기’다. 한겨울, 완행버스를 타고 시골길을 지나가던 시인의 눈에 외딴집 흙벽에 매달린 시래기가 들어온다. 그날 이후 병상에 누워 시래기를 떠올리던 시인은 바라고 또 바랐다. 누군가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따뜻한 죽 한 그릇이 되고 싶다고. 시인은 세상을 떠났고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강원도 양구에 사는 친구한테서 무청 시래기 한 박스가 택배로 왔다. 상자 속엔 손 편지도 곱게 앉아 있었다. 전화기 너머 친구는 뭐가 그리 바쁜지 빠르게 말한다. “시래기는 된장에 조물조물 무쳐서 오래 끓여야 맛있어. 먹기 바로 전에 들깻가루를 듬뿍 넣고. 좋은 것만 먹어야 해. 배달 음식은 마카(모두) 몸에 안 좋아. 간나야, 알았지.”
울컥했다. 쉰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간나”라고 부르는 고향 친구의 잔소리가 정겨워서. 잊고 있던 오래전 산골 마을 풍경이 떠올라서. 어린 시절, 친구네 집에도 우리 집에도 흙벽 처마 밑엔 새끼에 엮인 무 잎과 배춧잎이 춤을 추고 있었다. 햇살 좋은 날엔, 처마 끝 고드름이 녹아 마른 잎에 닿을까 마음 졸이기도 했다. 가난의 상징 시래기가 고운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시인의 노래로, 친구의 잔소리로.
시래기는 국으로 무침으로, 때론 죽으로 밥상에 올랐다. 지역마다 불리는 이름도 많다. 씨래기 씨라구 씨라리 시라구 시리기 시락지 실가리 씨레이…. 시래기라는 말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원이 명확하진 않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무청이나 배추의 잎을 말린 것"으로 설명한다. 무청은 무의 잎과 줄기다. 무든 배추든 잎을 알뜰하게 갈무리해서 말리면 시래기라는 뜻이다. 경남 통영에 가면 이름난 ‘시락국’ 맛집이 있다. 시락국은 시래깃국의 경상도 사투리다.
우거지와 시래기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이가 여럿이다. 푸성귀를 다듬을 때 따로 골라놓는 겉대가 우거지다. 김장김치나 젓갈을 맛있게 담가 통에 담은 후 맨 위에 덮는 배추 이파리도 우거지다. 시들고 못생겨서 ‘우거지상’이라는 말이 생겼다. 우거지의 어원은 '웃걷이'다. '웃'은 위나 겉을 뜻한다.
햇볕에 바짝 마른 시래기. 소금에 절어 축 늘어진 우거지.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지만 많은 이의 입맛을 살리는 영양식이다. 몸속 물기를 날리고 누군가의 시래기죽 한 그릇이 된다는 것, 참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