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개가 된 헌법기관들

입력
2024.12.24 19:00
22면

편집자주

88년생 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와 93년생 곽민해 젊치인 에이전시 뉴웨이즈 이사가 2030의 시선으로 한국정치, 한국사회를 이야기합니다.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던 1979년 8월 10일 밤, 경찰은 '101 작전'이라고 이름 붙인 강제해산 작전을 준비했다. 약 1,000명을 동원해 200여 명의 농성 노동자를 신민당사에서 끌어내는 게 목표였다. 대원들에게는 "신민당을 상대할 때는 기죽지 말고 과감하게 하라"는 지시도 하달됐다. 이들이 신민당사로 들이닥친 건 다음 날 새벽 2시. 신민당 정치인과 노동자들이 모두 끌려 나오는 데에는 채 30분이 소요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YH무역 노동자 김경숙씨가 건물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무자비한 진압 작전이었다.

YH무역 사태 당시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여공들에게 당사를 내어주는 한편 경찰의 고압적인 태도에 분개해 경찰 간부의 뺨을 후려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날 당사에는 신민당 국회의원 30여 명도 있었다. 이들은 김 총재와 YH무역 노동자들을 지키기 위해 육탄 방어를 불사했다. 그 과정에서 다리와 갈비뼈가 부러지고, 얼굴이 피범벅이 되는 등 중상을 입은 이들이 속출했다. 그러나 공권력의 위협을 무릅쓰고 얼굴 터져가면서 싸운 그들이 있었기에 YH무역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더욱 크게 세상에 전달될 수 있었다. 국민의 공분을 일으킨 이 사건은 부마항쟁으로 이어졌고, 영원할 것만 같았던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는 계기가 됐다.

느닷없이 45년 전 신민당 정치인들의 결기를 떠올리게 된 건 텔레그램 때문이다. 최근 공개된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의 텔레그램 단체방 대화록에는 비상계엄 선포 직후 당황한 의원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김상욱·우재준·한지아 등 친한계 의원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자신이 어디로 가서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개개인이 헌법기관인 그들은 우왕좌왕하면서 지도부 지시만 마냥 기다렸다. 한심했다. 이런 사람들이 전쟁을 지휘했다면 그 부하들은 다 죽었을 것이다.

탄핵 정국에 접어들며 국민의힘은 전열을 재정비했다. 황당하게도 그 방향은 여론의 반대편에 서는 것이었다. 대통령 탄핵에 찬성한 당대표를 향해 욕설을 퍼붓고 물병을 내던졌다. 자당 의원들이 탄핵소추안에 찬성표를 던지지 못하도록 노골적으로 겁박했다. 탄핵에 찬성했다고 밝힌 의원들은 의원총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면전에서 탈당을 요구받는 등 심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국민의힘이 쫓아내고 구속한 건 단지 한동훈과 그의 측근만이 아니었다. 정당 민주주의였다.

부당한 권력에 목숨 걸고 맞서는 모습은 바라지도 않는다. 최소한 그렇게 싸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하진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당대표와 동료들이 린치당하고 있는데 비겁하게 숨죽인 의원들도 국회의원 자격이 없긴 마찬가지다. 그 정도 용기도 못 내는 사람들이 어떻게 십수만 지역구민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겠나. 비상계엄 선포,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등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주체적인 판단 한번 하지 못하고 그저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나 맹목적으로 따랐던 이들에게는 '졸장(拙將)'의 자격도 없다. 졸개들일 뿐이다. 우리 헌법은 국회의원들에게 불체포특권, 면책특권 등 각종 특권을 보장하고 있다. 자유로운 정치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그런 특권을 누리고 있다면 제발 부끄러운 줄 아시라.


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