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국군에게 희생된 경남 '산청·함양 민간인 학살 사건' 피해자 유족에게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첫 법원 판결이 나왔다. 소멸시효가 쟁점이었지만 재판부는 유사한 거창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은 장기소멸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결한 2022년 10월을 소멸시효 계산 기준점으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부산고법 민사5부(부장 김주호)는 산청·함양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족 15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18억2,583만 원을 지급하라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고 23일 밝혔다.
산청·함양 민간인 학살은 1951년 2월 7일 산청군 금서면, 함양군 휴천면·유림면 일대 주민들이 공비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국군이 민간인 705명을 무차별 사살한 사건이다. 1996년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시행 이후 희생자 명예 회복은 이뤄졌으나 유족들에게 금전적 보상은 없었다. 이에 유족들은 "공무원인 국군에 의해 자행된 불법행위라 정부가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며 지난해 3월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1심은 국가의 불법행위를 원인으로 하는 손해배상채권은 불법행위일로부터 5년(장기소멸시효), 민법상 불법행위의 손해배상 청구 단기 소멸시효는 3년이라는 점을 들어 원고 패소 판결했다. 유족들이 과거사정리법에 따라 설치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활동이 끝난 2010년 6월 30일로부터 3년 내 소송을 제기하지 않아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항소심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이 산청·함양 사건과 유사한 거창사건에 대해 "집단희생 사건은 원고들의 손해배상채권에 장기소멸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결한 2022년 10월을 유족들이 손해배상을 신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소멸시효 기산점으로 봤다. 재판부는 "이전까지 구제의 기회가 부여되었음에도 원고들이 이를 방기한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며 "불법행위를 원인으로 한 손해배상청구권의 경우 채권자가 불법행위의 피해자라는 점에서 일반 채권에 비해 보호의 필요성이 크다는 사실도 함께 고려돼야 한다"고 판시했다. 위자료 액수는 다른 민간인 희생 사건과의 형평성을 고려해 사망자 본인 1억 원, 당시 생존한 사망자의 배우자는 5,000만 원, 부모와 자녀는 각 2,000만 원, 형제자매는 1,000만 원으로 정했다.
정부는 2심 판결에 불복해 상고한 상태다. 김재생 산청·함양 사건 유족회장은 "사건 발생 70여 년 만에 첫 국가배상 판결을 받았지만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고 상고해 유족을 두 번 울리고 있다"며 "유족 732명 중 이제 남은 사람은 164명에 불과한 만큼 더는 괴롭히지 말고 특별법을 제정해 일괄 배상하라"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