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잘못 뽑은 것일까?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반역'이 맞지 않나.
그렇지 않다. '성공하면 혁명'은 오래가지 않는다. 5·16은 처음엔 혁명이었지만 30년 뒤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쿠데타로 바뀌었다. 12·12 역시 16년 만에 내란으로 규정됐다. 명분이 제아무리 그럴싸해도 세월이 지나면 그 본질은 저절로 드러난다. 반역을 일으킨 자는 으레 혁명을 명분으로 내세워 반역을 정당화하지만, 반역은 반역일 뿐이다. '성공하면 혁명'은 잠깐에 불과하다.
성공한 혁명은 타락하기 쉽다. 혁명을 명분으로 내세운 정권은 이전 정권의 행태를 반복함으로써 스스로 그 정당성을 상실한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돼지들처럼. 역사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조선 태조는 '역성혁명'으로 정권을 잡았으나 바뀐 것은 그야말로 통치자의 성씨뿐이었다. 체제 개혁 없는 통치자의 교체는 혁명이 아니다. 계유정난(1453년), 중종반정(1506년), 인조반정(1623년) 모두 마찬가지다.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새로 즉위한 국왕과 반정공신들의 행태는 폐위된 국왕 및 그 측근들의 행태와 다를 것이 없었다. 결국 혁명과 반정은 성공한 반역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실패하면 반역' 역시 영원하지 않다. 실패한 반역이 역사의 재평가를 받고 혁명으로 격상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국가의 수탈에 맞선 농민의 봉기를 봉건 왕조는 '민란'으로 규정하고 진압하지만, 근대 국민국가는 혁명이라며 찬양한다. 그래서 '동학난'이 '동학농민혁명'으로 바뀐 것이다. 정여립과 허균의 역모 사건, 김옥균의 갑신정변은 반역인지 혁명인지 여전히 논란이다.
정여립의 역모가 성공했다면 반상의 구별 없는 대동 세상을 이루었을까. 허균의 역모가 성공했다면 적서차별이 사라졌을까. 동학 농민군이 한양을 접수했다면 사람이 곧 하늘인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을까. 실패한 반역이 혁명이라는 낭만적 용어로 미화되는 이유는 ‘성공했더라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허무한 좌절로 인한 아쉬움 탓이다. 처참한 패배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고 합리화하려는 변명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 계엄이 내란이냐 아니냐를 다투는 상황은 차라리 다행스럽다. 계엄이 성공했다면 명백한 내란이고 국민에 대한 반역이다. 대한민국은 수십 년 전으로 후퇴하고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었을 것이다. 계엄이 성공했다면 '계엄의 형식을 빌린 호소', '고도의 통치행위' 따위의 발언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실패한 계엄을 수습하려는 변명에 불과하다. 계엄을 옹호하는 논리는 그래서 궁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