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때문일까? 주먹밥은 한국인의 전투식량이었다. 기원은 분명치 않지만 기록은 430여 년 전인 임진왜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선조 때 학자 이식의 시문집 '택당집'에는 중전 의인왕후의 일화가 담겨 있다. 일본이 침략해 선조가 먼저 피난을 떠나고 의인왕후가 뒤따랐는데, 평안북도 의주 인근에서 쉬어가던 중 주먹밥으로 허기를 달랬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일상의 쌀인 단립종 자포니카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밥을 손으로 뭉쳐 주먹밥을 만드는 행위는 매우 자연스럽다. 찰기라 일컫는 밥알의 서로 달라붙는 특성은 아밀로펙틴이라는 전분 때문이다. 아밀로펙틴은 밥알에 물리력을 가하면, 즉 누르거나 치대면 활성화된다. 덕분에 치대고 뭉치기는 원래 그릇에 담아야 편히 먹을 수 있는 밥에 휴대성을 불어넣는 가장 손쉬운 요령이었다.
주먹밥은 밥 자체를 제대로 차려 먹지 못하는 시급한 상황에 요긴하게 쓰여왔다. 전투를 위한 식량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말이다. 문자 그대로의 전투뿐만 아니라, 생사가 걸린 상황이라면 홀연히 나서 제 몫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농번기 서민들의 새참이었다. 우리는 불과 50년 전에도 보릿고개를 겪고 나무껍질을 씹어야 할 만큼 어렵게 살았다. 따라서 농사는 생존을 위한 전투였고 새참인 주먹밥은 전투식량이었다.
이름이 직관적으로 말해주듯 주먹밥은 아주 간단히 만들 수 있다. 그저 밥을 적당량 쥐어 손으로 뭉치면 끝인데, 그게 전부는 아니다. 우리의 식문화는 밥에 간을 하지 않고 반찬으로 맛을 더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휴대성과 간편함을 위해 반찬을 제외한다면 밥에 최소한의 맛을 불어넣어줘야만 하고, 소금물과 참기름 혹은 들기름이 이 역할을 맡았다. 손에 이들을 묻히고 밥을 뭉쳐 누르면 자연스레 맛이 배어 한결 나은 전투식량으로 거듭났다.
주먹밥은 6·25 전쟁에서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 충실한 전투식량으로서 진가를 발휘했다. 북한의 남침에 맞서 우리는 처절하게 싸워야 했고 그런 와중에서도, 아니 그런 와중이기에 밥은 더 철저하게 챙겨 먹어야만 했다. 인터넷에 '주먹밥'을 검색해 보시라. 병사들이 전투가 벌어지지 않을 때 함께 주먹밥을 빚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후방에서 쌀을 지원받아 주먹밥을 빚었는데, 이때 종류가 굉장히 중요했다. 밥이 반드시 뭉쳐져야 휴대가 가능했기에, 안남미 말고 끈기 있는 쌀을 보내달라고 당부했다는 이야기가 오늘까지 전해 내려온다. 사진 속 어른 주먹보다 크게 뭉쳐진 밥이 전쟁의 현실을 시사하는 가운데, 병사들은 이렇게 만든 주먹밥을 겨울이면 입김으로 녹여 먹어 주린 배를 달래가며 싸웠다.
주먹밥은 또 다른 향토 음식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전북 전주의 옛 남밖장(현재 남부시장)은 동트기 전 새벽마다 나무를 팔러 나온 나무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나무꾼들은 대부분 전주 인근 지역에 살았으니 이른 새벽길을 떠나야 아침나절에 남밖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아침을 먹을 만한 여유가 없어 대신 주먹밥을 싸 들고 길을 나섰다.
서두른 덕분에 아침 제 시각에 도착해 나무를 다 팔고 나면 나무꾼들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밥을 먹었는데 남밖장의 주요 메뉴는 콩나물국이었다. 행상에게 주먹밥을 건네면 먹기 좋도록 따뜻한 콩나물국을 여러 번 끼얹고 따라 내 데워주었다. 바로 이 토렴의 과정 속에서 남부시장식(혹은 토렴식) 전주 콩나물국밥이 탄생했다. 오늘날 남부시장식은 직화에 끓여 내는 '삼백집'식과 더불어 전주 콩나물국밥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주먹밥이 전라도의 향토 음식이었음을 감안하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매우 요긴한 전투식량으로 제 몫을 해냈다는 사실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1980년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운동 이야기로, 2021년 승인을 받은 '5·18 민주화운동 교과서'에는 당시 주먹밥의 활약상이 자세히 실려 있다. 계엄군이 시 외곽을 차단해 갈수록 생필품이 부족해졌고, 특히 주식인 쌀이 가장 먼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에서 어느 누구도 사재기를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집의 쌀을 가져와 길가에 솥을 내걸고 시민군을 위해 밥을 지었다. 그리고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에게 제공했다. 특히 대인, 양동, 서방시장의 어머니 상인들이 '주먹밥 어머니'로 맹활약했다. 역할을 나눠 몇몇 어머니는 밥을 짓고 주먹밥을 만들었고, 다른 어머니들은 주먹밥과 음료수를 날라 금남로를 오가는 시민군 트럭에 올려주었다.
그렇기에 광주에서 연대와 나눔의 상징인 주먹밥은 2019년 광주광역시에 의해 시의 대표 음식으로 선정되어 '광주주먹밥'이라는 브랜드로 뻗어나가고 있다. 다양한 주먹밥의 레시피를 전파하고 메뉴를 개발하며 전문점을 지정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 음식과 맛을 통해 역사를 기억하려는 시도를 다각적으로 펼치고 있다. 시에서 전문 판매점과 취급점을 심사 및 선정하고 간판을 비롯해 식기, 앞치마, 도시락 용기 등을 무료 지원한다.
하지만 일상에서 주먹밥은 점차 삼각김밥으로 대체되었다. 1990년대 초반 본격적으로 편의점이 진출하면서 변화가 찾아왔다. 납작하면서 각져 휴대성이 조금 더 좋은 한편, 갖가지 맛의 소를 품어 선택의 폭이 넓은 삼각김밥이 대세로 자리를 잡아버렸다.
그렇다고 주먹밥의 의미, 주먹밥 정신이 아예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최근 본의 아니게 확인할 수 있었다. 대통령의 12·3 불법계엄 탓이었다. 인터넷으로 소식이 퍼져나가자 시민들이 마치 의견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삽시간에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모여 계엄군과 경찰의 진입을 최대한 막았다.
한편 국회의원 190명은 월담 등의 필사적인 행동으로 집결해 민주주의적 표결로 계엄을 무효화시켰다. 여의도에 모인 시민들은 바로 민주 시위를 벌였고 재빠르게 어묵과 닭꼬치 행상이 등장, 갑작스러운 한밤의 움직임에 춥고 주린 이들을 달래주었다. 그렇게 본격적인 평화 시위가 벌어지면서 '금강산도 식후경' 문화와 주먹밥 정신이 어우러져 돌연 '선결제'라는 거대하고도 다채로운 움직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시작은 따뜻한 커피였다. 시위 장소 인근 카페에 미리 돈을 지불해 이름이나 별명을 대면 커피를 찾아 마실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이어 점차 품목이 다양해지면서 떡이나 김밥 등을 넘어 김치찌개나 국밥 같은 본격적인 음식으로 메뉴도 다양해졌다. 무명의 시민들로부터 시작한 선결제 열풍은 연예인의 참여까지 이끌어 냈고, 덕분에 민주 시위에 참여한 이들이 추위와 허기를 좀 더 효과적으로 달랠 수 있었다.
탄핵이 국회에서 가결되어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기까지, 12일의 기간 동안 선결제 열풍은 여의도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5·18 민주화운동의 주먹밥 정신이 깔려 있었다. 시위 현장의 선결제 정보를 모아 'X(옛 트위터)'에 알렸던 계정 '시위도 밥먹고(@torchmapkr)'는 "1980년 8월 18일 사심 없이 주먹밥을 쥐던 손길이 2024년 12월 14일 여의도에서 재현된 것"이라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바로 지난주에 일어난 역사를 쓰고 있는 마음은 벅차면서도 참담하다. 실질적이든 상징적이든 주먹밥이 필요한 투쟁의 순간이 다시 찾아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한편 갑자기 등장한 선결제 문화도 일부 업주들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보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주먹밥의 역사가 민주적, 평화적으로 마무리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