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16일 사퇴했다. 7월 당대표로 선출된 지 불과 5개월 만이다. '국민 눈높이'를 앞세워 윤석열 대통령과 차별화를 꾀했지만 탄핵 국면을 넘지 못하고 좌초했다. 민심에 부응해 탄핵 찬성으로 돌아섰다가 다수파인 친윤계의 반발에 사실상 축출됐다.
이로써 검사 출신 정치 신인의 실험은 일단 끝났다. 리더십과 경험 부족은 한계로 꼽힌다. 치명상을 입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다만 '조기 대선' 가능성이 유력한 상황에서 그의 출마 여부는 향후 여권의 판도를 좌우할 가장 큰 변수로 남았다.
한 대표는 국회 기자회견에서 “최고위원들의 사퇴로 최고위가 붕괴돼 더 이상 당대표로서 정상적 임무수행이 불가능해졌다”고 밝혔다. 이틀 전 탄핵안 가결에 대해서는 "탄핵이 아닌 이 나라에 더 나은 길을 찾으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며 "모두 제가 부족한 탓"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한 대표는 앞서 윤 대통령에게 '2월 퇴진 4월 대선 또는 3월 퇴진 5월 대선'의 조기 퇴진 로드맵을 제시했지만 거부당하자 탄핵 찬성으로 입장을 바꿨다.
한 대표는 비상계엄이 '불법'이라고 못 박았다. 그는 “국민의힘은 12월 3일 밤 대표와 의원들이 국민과 함께 제일 먼저 앞장서서 우리 당이 배출한 대통령의 불법계엄을 막아냈다”면서 “헌법과 민주주의를 지켰다”고 자평했다. 당시 불법계엄에 반대 메시지를 내면서 친한동훈계를 중심으로 여당 의원 18명이 계엄 해제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 과정에서 친윤계인 추경호 원내대표와 마찰을 빚었다.
한 대표는 “(불법계엄 반대가) 진짜 보수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사랑하는 진짜 국민의힘의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향후 탈당이나 분당 가능성에 거리를 둔 셈이다. 야당을 향해서는 “계엄이 잘못이라고 해서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의 폭주와 범죄 혐의가 정당화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라고 쓴소리를 잊지 않았다.
불법계엄 선포라는 상황적 제약과 개인의 리더십 부족으로 인해 조기 사퇴가 불가피했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근본적으로 윤 대통령이 계엄을 한 것 자체가 큰 문제이고 이후 (보수 지지층을 배려해) 그나마 억지로 짜낸 옵션이 ‘2, 3월 조기퇴진’인데 그것마저 윤 대통령 본인이 거부한 상황에서 탄핵이 아니면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마찬가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의미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은 "정작 책임이 큰 친윤계가 한 대표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운 것"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이준한 인천대 정치학과 교수는 한 대표가 불법계엄 선포 이후 '윤 대통령의 조속한 직무정지→질서 있는 퇴진→탄핵 찬성'으로 오락가락하며 불안정한 리더십을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입장을 수시로 바꾸며 지도부와 소속 의원들의 지지를 잃었다"면서 "그전에도 매번 대통령과 대립하고 소수파 수장처럼 행동해 포용적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한 대표는 총선 참패 이후 3개월 만에 당권 도전에 나섰다. 이에 주변의 만류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득보다 실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당대표가 대통령과 차별화에 나서면 거센 견제가 불가피하고, 반대로 대통령과 코드를 맞추면 대권 주자 브랜드가 훼손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윤석열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했다. 당대표 경험 없이 대권 도전으로 직행하면 '정치 경험 없는 검사 출신' 이미지가 윤 대통령과 겹치기 때문이다. 당시 판단의 결과 불법계엄의 유탄을 정면으로 맞게 됐다.
한 대표는 사퇴 회견 후 국회를 빠져나가며 지지자들을 향해 "저는 포기하지 않는다"고 외쳤다. 정계 은퇴 가능성과 거리를 둔 발언으로 해석된다. 다만 탄핵 정국 이후 조기 대선이 치러질 경우 후보로 나설 수 있을지는 전망이 엇갈린다. 여당 지도부는 그에게 적대적인 친윤계 위주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 엄 소장은 "탄핵 정국에서 오락가락하며 강성 지지층과 중도 양쪽의 지지가 허약해졌고, 당대표 프리미엄도 없어져 이전 같은 지지율이 유지될지 의문"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윤 실장은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국민의힘이 지금처럼 (친윤계 위주로만) 갈 수는 없고 윤 대통령과 선을 그을 수밖에 없는데 그때는 한 대표가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