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의 충복'인 군 지휘부와 국가정보원 수뇌부마저 돌아섰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 선포 직후 국회와 선관위, 야권, 시민사회 인사들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는 증언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계엄의 진상을 은폐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백기투항이 잇따르면서 군과 정보당국이 동요하고 있다.
계엄 작전의 두 축인 곽종근 육군특수전사령관과 이진우 수도방위사령관은 6일 야당 의원들을 연달아 만나 당시 상황을 실토했다. 두 사령관은 계엄을 사전에 모의했을 것으로 지목된 '한남동 공관 모임' 멤버다. 더불어민주당은 '충암파'의 좌장인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경호처장 시절 곽 사령관, 이 사령관, 여인형 방첩사령관과 계엄을 모의했다고 주장해왔다.
곽 사령관은 계엄 당시 707특수임무단과 제1·3·9공수특전여단의 국회의사당, 중앙선관위 투입을 지휘했다. 그는 민주당 김병주·박선원 의원과 만나 계엄 발표 직후 김 전 장관이 △국회의사당 △중앙선관위 △여론조사 꽃을 지목해 시설을 확보하고 외곽 경비를 지시했다고 털어놨다. 여론조사 꽃은 김어준씨의 여론조사기관이다. 당시 김 전 장관은 "국회 안에 있는 인원들을 밖으로 빼내라"고 지시했지만, 곽 사령관은 이를 거부했다고 밝혔다. 그는 "국회의원을 끌어내는 건 위법사항이고, 임무 수행 요원들이 당연히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며 "항명이 될지 알았지만 그 임무를 지키지 않았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직접 전화로 군 부대 투입 상황을 확인하며 적극 가담한 사실까지 드러났다. 곽 사령관은 "(윤 대통령이) 707이 이동할 때 '어디쯤 이동하고 있느냐'고 한 번 (전화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 707부대의 국회의사당 투입이 늦어지자, 윤 대통령이 곽 사령관에게 직접 비화폰으로 전화를 걸어 이동상황을 확인한 것이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이 재차 계엄을 시도할 우려에 대해선 "그런 지시가 있더라도 거부하겠다"고 공언했다.
이 사령관도 계엄 발표 당일 밤 12시쯤 국회 현장 상황을 확인하는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다고 밝혔다. 이 사령관은 "윤 대통령이 (제게) 전화해 '(국회) 상황이 어떠냐'고 물었다"며 "'굉장히 복잡하고 인원이 이동할 수도 없다'고 보고했더니 대통령은 가만히 듣다가 '알겠다'면서 전화를 끊었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들에게 사과를 전한 뒤 '2차 계엄' 지시가 있더라도 절대 응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홍장원 국가정보원 1차장은 국회를 찾아 계엄 당시 전후 상황에 대해 여야 의원들에게 비공개로 보고했다. 김병기 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계엄 선포 직후 홍 차장에게 전화해 "이번 기회에 다 잡아들여. 싹 다 정리해"라면서 "국정원에도 대공수사권을 줄 테니 우선 방첩사령부를 도와 지원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홍 차장은 이후 여인형 방첩사령관으로부터 검거 지원 요청을 받는 과정에서 체포 대상자 명단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체포 대상자 명단에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우원식 국회의장,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김민석 박찬대 정청래 민주당 의원,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 김어준 방송인, 김명수 전 대법관, 김민석 의원의 친형 김민웅 교수, 권순일 전 선관위원장을 비롯해 선관위원, 노총위원장이 포함됐다. 여 사령관은 당시 "1차, 2차 검거 대상을 순차적으로 검거할 예정이며 방첩사에 있는 구금시설에 구금해 조사할 예정"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처럼 진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만 은폐 의혹은 여전하다.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됐던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위증을 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군 내부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박 총장은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3일 서울 일정을 마치고도 육군본부가 있는 충남 계룡대로 돌아가지 않은 채 대기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박 총장이 전날 국방위에서 윤 대통령의 담화를 보고 계엄 선포 사실을 알았다고 주장했던 것과 배치되는 내용이다.
계엄 관련 문서 파기 의혹도 불거졌다. 박선원 민주당 의원은 "방첩사에서 친위 쿠데타 관련 문서를 파기 중"이라며 "거부한 중령급 요원들에 대한 보직대기 발령을 내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1차장 출신인 박 의원은 윤 대통령이 계엄을 발표하기 이전부터 한남동 공관 모임과 충암파 인사 등을 근거로 계엄 시도가 있었다고 지적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