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이른바 대왕고래 예산 삭감을 언급하며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을 두고 관가를 중심으로 "현실과의 괴리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해마다 국회와 예산으로 줄다리기를 해 온 정부 부처 관계자들은 이번 예산 삭감 폭이 통상적 수준보다 크긴 하지만 예산안의 본회의 상정이 보류돼 있었던 만큼 그동안 경험을 바탕으로 협상할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고 판단했다. 비상계엄으로 나아갈 만큼 '국가비상사태'라 보기엔 어렵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3일 긴급 브리핑에서 "민주당은 내년도 예산에서 (동해) 심해 가스전 개발 사업 등 4조1,000억 원을 삭감했다"며 "이러한 예산 폭거는 한마디로 대한민국 국가 재정을 농락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윤 대통령은 이어서 "민주당은 입법 독재를 통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전복을 기도한다"며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예산 삭감→입법 독재→자유민주주의 전복→비상계엄 필요'의 사고 흐름을 드러낸 것이다.
여러 예산 삭감 사례 중 대표적으로 언급된 동해 가스전 개발 사업은 윤 대통령이 직접 대국민 발표를 했지만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정부가 제출한 예산의 98%가 깎였다. 여러 예산안 중에서 삭감 폭은 이 사업이 가장 컸다.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는 예상치 못한 '전액 삭감' 수준의 예산안이 나오자 패닉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이에 박성택 산업부 1차관은 3일 비상계엄 발표 몇 시간 전에 기자 간담회를 열고 예산 복구 필요성을 강조하며 "용산 대통령실에서 상황을 매우 엄중하게 바라보고 필요한 조치를 하고 있는 걸로 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산업부에서 기자 간담회를 열고 몇 시간 뒤에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해버렸다는 점이다. 산업부 입장에서는 용산 대통령실에서 '필요한 조치'를 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 조치가 비상계엄이 돼버린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한 산업부 관계자는 "박성택 1차관이 언급한 '조치'는 통상 정부가 예산 정국 때 국회를 상대로 설득할 수 있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는 정도의 수사였다"며 "그 어떤 공무원도 예산이 삭감된다고 비상계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관가에서는 이와 관련해 "윤 대통령과 일선 부처 사이에 예산 정국을 대하는 태도에 상당한 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또 다른 경제부처 고위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국회의 예산 삭감을 정부에 대한 공격이라고 받아들이는 거 같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정부가 요구하는 예산안은 분명 필요한 만큼 요청하지만 국회에서 무조건 통과시켜줘야 하는 건 아니다"라며 "국회와 예산 줄다리기할 때는 이런 마음가짐이 기본이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윤 대통령과 국회와의 간극은 훨씬 심하다는 게 정치권과 관가의 공통된 분석이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국회 관계자는 "대왕고래 프로젝트와 같은 단일 사업 진행에 직접 영향을 주는 예산을 대규모로 깎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결국 의원들의 지역 예산 배정 등을 두고 협상하면서 예산을 회복해 주는 게 통상적 예산 정국 흐름"이라고 설명했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2일 여야 합의가 필요하다며 삭감된 예산안을 본회의에 상정하지 않고 협상 여지를 만든 것도 이런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은 여야 간 협상 과정을 기다리지 않고 비상계엄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두고 정부 내에선 "윤 대통령의 급발진"이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한 정부 고위 관계자는 "윤 대통령의 예산 정국에 대한 무지로 인한 과격한 의사결정이 45년 만에 비상계엄이 선포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