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암살' 발언 역풍… 필리핀 두테르테 부통령 탄핵 급물살

입력
2024.12.03 14:58
진보 시민단체, 하원에 탄핵 소추 청원
"타인 위협 헌법 위반, 국민 믿음 배신"
"대통령파 하원 장악... 탄핵 의결될 듯"

자신이 살해되면 대통령을 암살하라고 지시한 필리핀 부통령 발언 후폭풍이 거세지고 있다. 시민사회는 물론 대통령을 지지하는 계파 중심으로 탄핵 움직임이 급물살을 타면서 현지 정치권이 격랑으로 빠져들고 있다.

3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레이라 데 리마 필리핀 전 상원의원과 진보정당 연합, 진보 성향 시민사회 단체는 전날 하원에 새라 두테르테 부통령 탄핵 소추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두테르테 부통령이 타인의 생명을 위협하며 헌법을 위반했고 국민의 믿음을 배신했으며, 대규모 부정부패를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리마 전 의원은 “탄핵 소추는 단순한 법적 다툼이 아니라 공공 서비스에 대한 존엄성과 예의를 회복하기 위한 ‘도덕적 십자군’”이라며 “두테르테 부통령은 노골적 권력 남용으로 공직에 대한 신뢰를 훼손했다”고 말했다.

두테르테 부통령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의 딸이다. 그는 지난달 23일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자신을 겨냥한 암살 계획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자신의 경호원에게 본인이 피살될 경우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과 영부인, 대통령의 사촌인 마틴 로무알데스 하원의장을 살해하라 지시했다고 말했다.

이후 대통령궁은 사안을 ‘심각한 위협’으로 보고 국가안보 문제로 엄중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국가수사국은 지난달 29일 두테르테 부통령에게 소환장을 발부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하원이 두테르테 부통령 탄핵 소추 검토를 결정하면 사법위원회는 탄핵 내용과 형식을 구체화하게 된다. 이후 의원 300여 명 가운데 3분의 1 이상이 탄핵을 의결하면 상원으로 넘어간다. 부통령 탄핵 움직임에 마르코스 대통령은 “국민 삶을 개선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데 왜 시간을 낭비하느냐”며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위협 대상으로 언급된 로무알데스 하원의장은 “소추안이 보고되면 살펴보겠다”고 언급했다. 진보정당 연합도 본회의 의결 정족수를 채우는 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로이터통신은 “필리핀 하원은 친(親)마르코스파가 장악하고 있어 (검토 시) 하원을 통과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다만 이달 말 필리핀 최대 명절 크리스마스 연휴가 시작되는 데다 내년 초부터는 5월로 예정된 중간선거 국면에 접어드는 점 등을 감안하면 실제 탄핵 소추 일정이 시작되기까지는 수개월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필리핀 정계를 대표하는 두 가문 출신인 마르코스 대통령과 두테르테 부통령은 2022년 대통령 선거에서 러닝메이트를 이루며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친중·친미 등 외교 노선을 두고 두 가문은 대립하기 시작했고, 헌법 개정 추진 등 국내 정치 문제를 두고도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결국 동맹이 깨졌다.

하노이= 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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