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고 흥선대흥군은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웠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말자는 건 화친하자는 것이요, 화친은 곧 매국'이라는 내용이다. 말은 명쾌하나 세계 정세에 어둡고 조선의 역량을 과대평가한 결과는 머지않아 나타났다. 신미양요 5년 뒤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일본에 강제로 문을 열게 되는 불평등조약을 맺었다. 방어책으로 신흥 강대국인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었지만, 미일 밀약의 결과는 조선과 필리핀의 지배권을 상호 교환하는 뒤통수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육지와 바다가 남의 나라 전쟁터가 됐다. 우리 운명을 좌우할 힘이 없는 상황엔 식민지 쟁탈전 시대의 희생양이 되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다.
강대국 손아귀에 놀아난 게 어디 이뿐인가. 2차 세계대전 전후 질서를 다루기 위한 얄타 회담에선 강대국의 신탁통치안이 마련됐고, 한반도는 두 쪽으로 쪼개질 운명이었다. 그 분단선마저도 자연 지형과 무관하게 일개 미군 장교의 손에 좌우됐다. 물론 러일전쟁 직전엔 일본이 한반도를 38도선에서 나누자고 러시아에 제안했으니 그 역사는 깊은 편이다. 바람 앞 등불 신세인 약소국의 운명이 우리만의 일은 아니지만 지정학적 취약성에 유독 우리는 오랜 기간 피해를 적잖이 입었다. 역사적 트라우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냉엄한 현실 외교는 외양만 변했을 뿐 지금도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다. 러시아에 온 몸으로 맞서고 있는 우크라이나 역시 지원 세력인 미국의 정치변화, 도널드 트럼프 2기 체제가 들어서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릴 게 분명해 보인다. “취임 후 24시간 내 전쟁을 끝낼 것”이라는 트럼프의 공약을 실현하기 위한 막강한 수단을 가진 미국이 당사자인 우크라이나를 건너뛰고 러시아와 협상하는 시나리오를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트럼프의 재등장에 경제, 안보 문제가 걸린 세계가 전전긍긍하는 형편이고, 우리는 폭풍전야에 있다. 트럼프는 예측불가성으로 불확실성을 극대화하고 이를 협상력 제고 수단으로 삼는 노회한 전략가다. 북한의 김정은은 마치 전쟁을 벌일 듯한 트럼프 1기 시절의 기세를 버텨냈다. 보여주기 성과를 내고 싶어하는 트럼프는 김정은과의 1, 2차 정상회담이라는 뜻밖의 타협을 택했다. 빈손 회담이라는 말을 들었을지언정 한때 미국의 전략자산 전개와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한 건 김정은에게 큰 성과다.
지난달 21일 무기전시회에서 미국과 갈 수 있는 데까지 다 가봤다는 김정은이 “핵을 공유하는 군사동맹 확대와 전략 자산의 한반도 전개”를 들면서 핵전쟁으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한 건 트럼프에게 구체적인 협상 조건을 제시한 걸로 여겨진다. 선제공격 운운 등 고도화를 이룬 북핵 위협을 수시로 받는 우리로선 받아들이기 어렵다.
지난달 조태열 외교부 장관의 기자간담회 당시 가시화하는 북미회담과 관련해 고위당국자는 “우리 주도로 우리 입장이 반영되는 과정을 통해 미국이 북한과 대화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연 자신할 수 있을까. 정상적인 미국 대통령이라면 동맹국과의 조율을 통해 협상의 내용과 수위를 결정하겠지만, 상대는 김정은을 친구라고 부르는 트럼프다. 물론 우리 정부가 트럼프 전략을 잘 이해한다 해도 방어가 쉽지 않은 건 ‘체급 차이’가 워낙 나기 때문이다. ‘우리 없이 우리 일을 논하지 말라’(Nothing about us without us)는 결기를 보이지 않는 한 국익을 '패싱' 당하기 쉬운 환경이다. 핵동결을 골자로 한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때처럼 귀동냥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들러리를 서는 건 30년 전과는 체급이 달라진 우리의 자존심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