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물고기가 물속에서 헤엄치는 모습을 그려달라고 하시더라고요."
박소정(48) 작가는 20년 전, 세밀화 도감 화가 면접장에서 출판사로부터 이런 요구를 들었다. 앞선 지원자들이 줄줄이 포기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도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다. 족대로 물고기를 잡아 어항으로 옮긴 뒤 드로잉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헤엄칠 때 지느러미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찰했다. 매일 보다 보니 물고기에 빠져 버렸다. 아르바이트할 겸 시작했던 일은 7년간 이어졌다. 이때 그린 민물고기 130종, 350점의 세밀화는 "한 마리도 빠짐없이 편집자와 전국을 다니면서 살아 움직이는 물고기를 직접 보고 그린 것"이다.
책 '보리 생태 사전'은 세밀화가와 편집자의 이 같은 집요한 취재를 집대성한 결과다. 30년간 보리 출판사에서 내놓은 생태 도감을 바탕으로 한국 땅에 사는 동물, 식물, 균류 등 1,602종의 생물 정보를 세밀화와 나란히 실었다. 특히 더듬이 마디, 깃털 빛깔, 비늘 배열까지 생동감 있게 구현한 세밀화의 성취에 눈길이 간다. 참여한 세밀화가만 23명. 사진 자료가 넘쳐나는 시대, 세밀화로 생태 도감을 만드는 의미는 무엇일까. 박 작가와 권혁도(69), 이우만(50) 작가에게 물었다. 권 작가는 곤충을, 이 작가는 새를 그리는 세밀화가다.
작가들은 생물 정보가 순간을 포착한 사진보다 오랜 시간 관찰해 그린 세밀화에 더 집약된다고 입을 모았다. 권 작가는 "사진은 대상의 포즈상 안 보이거나 배경에 묻혀 버리는 부분이 있지만 세밀화는 관찰하고 이를 종합해서 다리, 더듬이 마디가 몇 개인지까지 그리기 때문에 정확한 정보를 그림 한 장에 담을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과 영상이 등장한 이후에도 여전히 '학술적 세밀화', 즉 '사이언티픽 일러스트레이션(Scientific Illustration)'의 명맥이 이어지는 이유다. 전광진 편집자는 "해외의 세밀화 연구를 보면 아이들이 실제로 생물을 구별할 수 있게 되기까지 봐야 하는 사진의 수가 그림의 수보다 훨씬 많다"며 "화가가 생물을 자세히 관찰한 경험을 그림을 보는 사람도 체험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세밀화를 본다는 건 그래서 "눈이 밝아지는 경험"이다.
사진은 피사체를 몰라도 찍을 수 있지만 세밀화는 다르다. 이 작가는 "그리는 사람이 새를 예로 들면 눈부터 부리, 꼬리, 발, 새가 앉아 있는 나뭇가지, 새가 먹는 먹이 같은 그림에 담기는 모든 정보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며 "세밀화는 대상의 가장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모습, 그 새가 다른 새와 가장 강하게 구분되는 특징을 부각해서 그리기 때문에 대상에 대해 아는 만큼 그림에 담기게 된다"고 말했다.
세밀화 작가들은 살아 있는 생물을 직접 보고 그리기를 원칙으로 삼는다. 권 작가는 집에서 항상 곤충을 기른다. 누에, 대왕박각시나방, 애호랑나비, 왕잠자리 등 그간 기른 곤충 종류도 다양하다. 호박과실파리의 애벌레, 즉 구더기를 관찰하겠다고 집에 들였다가 구더기가 거실 한복판으로 탈출하기도, 왕사마귀 알을 넣어놨던 서랍에서 깨어난 200여 마리의 애벌레가 온 방 안을 뒤덮었던 적도 있다. 지금은 큰쥐박각시나방 애벌레를 기른다.
이 작가도 "최소 한 번은 실제 모습을 보고 그리자"라는 태도를 갖고 있다. "생태 에세이 작업을 하면서 박새의 샘플 그림을 그려야 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그때까지 박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거든요. 인터넷에서 사진을 내려받아 똑같이 그렸죠. 똑같이 그리는 건 잘하니까. 저자분이 당연히 '잘 그렸네' 하실 줄 알았는데, '내가 알던 박새랑 좀 다른데' 하시더라고요. 그러다 박새를 처음으로 보게 됐어요. 딱 보는 순간 왜 안 닮았다고 하셨는지 알겠는 거예요. 그 그림에는 크기, 깃털 느낌, 눈빛 이런 게 전혀 없었거든요."
살아있는 것은 눈빛부터 다르다. 전 편집자는 "물고기는 물에서 꺼내는 순간 눈도, 색도 탁해진다"며 "바닷물고기를 그린 조광현 작가는 물속에서 살아있을 때의 느낌을 보려고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을 따서 바다에 들어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세밀화로 들여다본 세계에선 미물이란 없다. 생명의 신비로움만 있다. 박 작가는 "여울에 들어가서 자갈처럼 가만히 서 있었더니 첨벙대는 소리에 돌 밑으로 숨었던 꾸구리들이 안심하고 나와 점프하던 장면"이 생생하다. 이 작가는 "망원경으로 햇빛을 받은 청둥오리의 얼굴을 봤을 때 느꼈던 생명의 경이로움"을 잊을 수 없다.
사람들이 '징그러운 벌레'로만 여기는 곤충도 예외가 아니다. 권 작가는 "곤충의 일생은 알에서부터 성충이 될 때까지 탈바꿈의 연속"이라며 "탈바꿈의 순간은 언제 봐도 무척 감동적"이라고 했다. "풀숲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곤충들이 꼼지락 부스럭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죠. 수많은 생명체가 우리 주변에 모여 살아가고 있고, 거기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죠. 그러다 곤충하고 눈이 딱 마주치면 '너는 곤충이고 나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없어지고 모두 다 똑같은 생명체라는 것을 깨닫게 돼요." 그가 강연이 끝난 뒤 학생들에게 적어 주는 "몸이 크고 작다고 생명까지 크고 작은 게 아니라 삶의 무게는 다 똑같아"라는 글귀에 담긴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