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용 로봇과 인공지능(AI) 진단기기 같은 혁신적 의료기기가 즉시 환자 진료에 사용될 수 있도록 규제가 대폭 완화된다. 의료기기 허가부터 건강보험 등재까지 통상 490일가량 걸렸으나 앞으로는 80일로 단축될 수 있다. 하지만 사전 검증이 철저하지 않으면 안전성을 담보할 수 없고 비급여 확대로 환자 부담이 커질 것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처, 국무조정실은 21일 국정현안관계장관회의를 거쳐 ‘시장 즉시 진입 가능 의료기술 제도’를 신설하고 내년 하반기에 시행한다고 밝혔다. 기술 혜택을 신속히 활용할 필요가 있는 새로운 의료기기를 즉시 3년간 비급여로 사용할 수 있는 과정을 만들어 시장 진입 기간을 단축하는 게 골자다.
현재는 새 의료기기가 개발되면 인허가(최대 80일)를 받은 뒤 기존 기술 여부 확인(30~60일)을 거쳐 신기술일 경우 신의료기술평가(최대 250일)를 받아야 한다. 신의료기술평가는 의료기기를 활용한 수술, 시술, 진단, 검사 등 의료기술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평가하는 절차다. 이후 의료기술의 경제성과 효과성을 판단해 건강보험 급여 여부를 결정하는 데 100일가량 소요된다. 혁신적 의료기기가 출시돼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기까지 최대 1년 4개월이 걸리는 이유다.
하지만 ‘시장 즉시 진입 가능 의료기술 제도’가 도입될 경우 인허가 후 신기술이라는 사실만 확인되면 별도 절차 없이 3년간 비급여로 환자 진료에 사용 가능하다. 신의료기술평가와 건보 등재 절차는 3년 뒤로 유예한다. 업체가 원하면 인허가와 기술 확인을 동시 진행해 140일 걸리던 절차를 80일로 간소화할 수도 있다. 시장 진입까지 빠르면 80일, 늦어도 140일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시 진입 대상 의료기기는 독립적인 활용도가 높은 품목을 우선 선정하고 추후 단계적으로 확대한다. 현재 디지털 의료기기 7개, 체외진단 의료기기 37개, 인공지능 진단보조기기 93개, 의료용 로봇 3개 등 140개 품목을 검토 중이다.
정부는 시장 진입 기간을 단축하는 만큼 안전성 검증을 강화할 계획이다. 인허가 단계에서 임상평가는 임상시험, 경험, 문헌 등을 종합 분석하는 방식으로 개선하고, 시장 도입 후 위해성이 확인된 기술은 퇴출시킨다. 또 비급여 사용 현황을 6개월마다 모니터링해 임상적 중요성이 큰 의료기기는 조기에 건보 급여 적용을 추진하기로 했다.
정부는 규제 개선으로 기술 개발을 촉진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일각에서는 기업이 부담해야 할 안전성·효과성 검증 비용을 환자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즉시 진입 기간 중 발생한 사고와 부작용 등 환자 피해에 대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고, 3년 뒤 신의료기술평가에서 낮은 등급을 받아도 퇴출되지 않아 비급여 시장이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김재헌 무상의료운동본부 사무국장은 “신의료기술평가에 필요한 각종 임상 자료를 갖추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기 마련인데 환자들이 의료기기 사용료를 대신 지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신의료기술평가와 건보 등재 평가 기간에도 비급여 사용이 가능해 기업의 배만 불릴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시장 진입 후 안전성 확보 방안과 피해 구제 방안이 미흡하다”며 “사실상 환자를 3년간 시험 대상으로 삼으려는 조치일 뿐”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