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이 기업 이사에게 주주를 위한 충실 의무를 적용하는 상법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재계가 크게 반발하고 있다. '총수 일가'로 대표되는 최대 주주와 소액 주주의 이해 관계가 엇갈리면 이사의 배임죄 등을 묻는 소송이 자주 일어나 기업 경영 활동이 크게 위축될 거라는 주장이다.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와 삼성, SK, 현대차, LG 등 주요 16개 기업 사장단은 21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한국경제 재도약을 위한 주요 기업 사장단 긴급 성명'을 발표했다. 경제단체장이 아닌 주요 그룹 사장단이 공동 성명을 내는 건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확산 사태 이후 9년 만이다.
굳은 표정으로 단상에 오른 사장단은 김창범 한국경제인협회 상근부회장이 대독한 성명서를 통해 "위축된 경제 심리 회복을 위해 국회와 정부, 국민 여러분의 배려와 동참을 간절히 호소한다"고 밝혔다. 먼저 민주당이 추진하는 상법 개정을 "기업의 경쟁력이 크게 훼손되고 우리 증시의 밸류 다운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이어 "경제 활성화를 위해 과감한 규제 개혁을 추진하고 인공지능(AI) 반도체, 이차전지, 모빌리티, 바이오, 에너지, 산업용 소재 등에 지원을 아끼지 말아달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사실상 민주당의 상법 개정안 발의에 대한 항의로 읽힌다. 19일 이정문 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상법 개정안은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기존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하고 △총 주주의 이익을 보호하고 △전체 주주의 이익을 공평하게 대우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또 총자산 2조 원 이상인 상장사의 집중투표제(주주총회에서 선임되는 이사 수만큼 주주에게 의결권을 부여하는 방식) 시행을 의무화하고 주총에서 다른 이사와 따로 뽑는 감사위원 수를 늘리는 방안 등도 담았다. 민주당은 이 안을 당론으로 정하고 연내 처리한다는 방침이다.
주요 그룹 사장단은 공동 성명에서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많은 기업은 소송 남발과 해외 투기자본의 공격에 시달려 이사회의 정상 운영이 어려워지고 신성장 동력 발굴에도 상당한 애로를 겪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창범 부회장은 "사외이사는 소송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면 제대로 결정하기 어렵다"며 "심지어 사외이사를 구하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고 덧붙였다.
애초 민주당의 상법 개정안은 올해 초 윤석열 대통령이 "이사회가 소액 주주의 이익을 책임 있게 반영하도록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히면서 비롯했다. 하지만 재계가 법 개정을 통한 소수 주주 이익 보호를 강력 반대하고 정부도 1년이 다 되도록 단일안을 마련하지 못하면서 자본시장법이나 관련 제도 정비로 사회적 타협을 볼 수 있는 사안을 기본법(상법) 개정 논의까지 키웠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계단체 관계자는 "현행 제도로 (소수 주주 권익 보호는) 충분히 해결 가능하다고 봐서 그동안 대응 중심으로 메시지를 냈다"면서도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유나 보완점에 대해 재계단체가 방향을 제시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재계는 이날 소수 주주 권익을 보호하려면 상법 개정 대신 "자본시장법 개정 등 다른 방식의 접근이 바람직하다"고 정치권에 제안했다. 그러나 민주당 상법 개정안의 핵심인 '이사 충실의무 대상 확대'는 "주식회사의 근간을 흔드는 사안"이라며 자본시장법에서도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했다. 김창범 부회장은 "물적 분할이나 합병 등 소수 주주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 대해 핀셋 접근이 필요하다"며 "합병 비율 산정 방식을 시총에서 기업의 실질적 가치로 바꾸는 등 자본시장법 개정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는 상법 개정 저지를 위한 총력전을 예고했다. 다음 주 대한상공회의소 등 재계 단체, 주요 그룹 사장단이 민주당 증시 활성화 태스크포스(TF)를 만나 재계 입장을 전달한다. 김 부회장은 "경제가 어려운 이 시점에서 왜 16개 그룹 사장들이 모여 호소문을 낭독하는지 한 번쯤 돌아봐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