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 멀고 먼 한 나라에 방씨 성을 가진 한 자식이 없는 늙은 부부가···.'
이렇게 시작하는 박윤선(44) 작가의 책 '어머나, 이럴 수가 방 소저!'(이하 '방 소저')는 세계 최대 규모의 프랑스 앙굴렘국제만화축제에서 아동 부문 최고상을 올해 1월 받았다. 영화로 치면 칸국제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이다.
아들로 키워진 소녀의 모험담을 그린 '방 소저'는 한국 고전문학의 여성영웅소설과 닮았다. 허균의 조선 중기 소설 '홍길동전'과 19세기 작자 미상의 '방한림전'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인의 이야기가 또다시 세계를 휘어잡은 것이다.
2008년부터 프랑스에 거주 중인 박 작가와 최근 서면으로 만났다. "한국인 중에 홍길동 모르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런데 우습게도 저는 홍길동전을 프랑스에서 불어로 처음 읽었답니다. 제 식으로 시각화해보고 싶어서 쓴 만화책 '홍길동의 모험'이 2018년 프랑스에서 먼저 나왔고, 한국에서 2020년 출간됐어요. 그 책을 너무 좋아한 친구 딸이 2권은 언제 나오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때 박 작가의 머릿속에 번쩍 떠오른 게 방한림전이었다. 대학을 막 졸업하고 한국고전 전집의 일러스트 작업을 하던 당시 그가 처음 만났던 작품. 남장 여자가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하고, 장군이 되어 나라를 구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이야기로, '방 소저'와 큰 줄기가 유사하다. 여기까지가 '홍길동의 모험' 속편 격으로 '방 소저'가 탄생하게 된 이야기다.
'방 소저'의 여성 서사는 프랑스 현지에서부터 페미니즘 관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책은 대를 잇기 위해 남자 행세를 하는 등 가부장제를 재생산하는 남장 여자의 클리셰를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방 소저가 아들로 키워지게 된 것은 집안 하인이 태어날 아이의 성별을 아들로 예단하고 남자 옷만 잔뜩 만들어 뒀기 때문이다. 주인 부부는 여아 옷을 다시 짓는 대신 "옷 잘 어울리고 애도 좋아하니 (남자 옷) 있는 거 그냥 입히자"고 했고, 방 소저 역시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라며 개의치 않는다. 이후 노부부가 숨지면서 오해를 바로잡지 못했을 뿐이다. 박 작가는 "페미니즘적 해석이 감사하면서도 혹 페미니즘 장사처럼 비칠까 조심스럽다"며 "'선택'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은 독자의 몫"이라고 했다.
박 작가는 어린이 독자를 염두에 두면서도 "각자 자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니까 '어려서 이해 못 할 테니 이런 이야기는 빼야지' 하는 일은 절대 없다"고도 강조했다. 게다가 '방 소저'는 그가 지향하는 '개그 만화' 성격이 두드러진다. 성인이 읽어도 재미있다. 그는 "만화축제를 가면 온 가족이 같이 제 책을 읽는다는 가족들을 종종 본다"고 전했다.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를 보면서 만화가의 꿈을 키웠다는 박 작가는 2년짜리 창작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만화의 도시 프랑스 앙굴렘에 2008년 발을 디딘 후 쭉 프랑스를 주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프랑스 독자들에게도 한국 콘텐츠는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분위기다. 그는 "이미 프랑스에 한국문학이 많이 번역돼 읽히고 있고, 그림책도 많이 소개됐다"며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여기서 불어로 읽었다"고 했다.
박 작가는 반대로 프랑스어책을 내고 한국어 번역본을 국내 출간하고 있다. 앞서 펴낸 '홍길동의 모험'과 2020년 '우당탕탕 고양이 클럽', 2003년 '뿌뿌는 준비됐어!'는 앙굴렘국제만화축제 아동 부문 후보에 오른 바 있다. '방 소저'로 4번째 도전 끝에 영광을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