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에 미쳤던 시절, '기러기 아빠' 위해 세운 영어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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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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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나라가 영어에 미쳐 있던 시절이 있었다. 국제공용어인 영어의 중요성은 현재도 물론 작지 않지만 당시에는 모든 정책이, 모든 역량이 영어에 집중됐다. 1990년대의 키워드가 ‘닷컴’이었다면 2000년대의 키워드는 ‘글로벌’이었다. 오죽하면 유력 광역자치단체장 후보의 제1공약이 ‘영어마을 설립’이었고, 차기 대권 후보로 꼽히던 서울시장과 경기지사가 ‘누가 더 영어마을을 빨리 여느냐’로 경쟁했다. 영어마을 광풍이 지속되면서 새롭게 탄생한 마을들은 '영어 잘하기'의 꿈을 반영하듯 점점 환상적인 동화 속 한 장면처럼 진화를 거듭했다.

이국적인 건물과 외국인 직원들이 상주하는 ‘정주’형 영어마을을 처음 선거판에 올린 것은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출마한 손학규 당시 한나라당 경기지사 후보였다. 이후에도 손 지사의 역점사업으로 자주 거론될 만큼 중점사업으로 다뤘고, 이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1999년 1,839명에 불과했던 조기(초·중·고 재학) 유학생은 2000년 들어서 4,397명으로 139% 폭증했고 3회 지방선거가 치러진 2002년에는 1만 명을 돌파하며 3년 만에 5배가 늘었다. 영어마을의 대표격인 파주영어마을이 개원한 2006년에는 역사상 최고치를 기록해 2만9,511명의 학생이 해외 유학을 떠났다. 이 때문에 가족들을 유학 보내고 홀로 국내에 남아 생활비를 송금하는 ‘기러기 아빠’가 사회 문제로 대두됐다.

지금 보면 ‘왜 만들었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는 영어마을은 이런 시대적 배경이 낳은 발상이었다. 아이들을 외국으로 보내는 대신 국내에 ‘작은 외국’을 만들어 조기유학 수요를 대체하려는 시도였다.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영어 경쟁력을 향상시켜야 합니다. 경기도의 영어마을 조성은 시대적 조류입니다.
손학규 당시 경기지사, 영어마을 조성 심포지엄
우리는 자녀들이 영어를 배우도록 하는 데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용을 줄이고 시민의 영어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국제적인 규모의 영어체험마을을 완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2004년 신년사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 당선된 3기 민선 지방자치단체장들은 경쟁적으로 영어마을 설립을 추진했다. 가장 많은 학생 수요가 있는 서울시와 경기도는 서로 더 빠른 시일에 영어마을을 개원하기 위해 월 단위로 새 계획을 추진했다.

당초 경기도는 파주시 통일동산을 제1호 영어마을 부지로 확정해 2006년 개원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서울시는 강북구에 첫 영어마을을 건립할 부지를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 시장이 송파구 풍납동 옛 외환은행 합숙소를 리모델링해 2005년 10월 영어마을 운영을 시작할 계획을 발표했다. 영어마을 사업의 후발주자인 서울시가 신규 건립보다 시간이 절약되는 리모델링을 택해 선수를 둔 것이다.

이에 질세라 경기도는 안산시 공무원수련원을 영어마을로 탈바꿈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며 개원 시기를 서울보다 두 달 빠른 8월로 정했다. 2004년 하반기 경기영어마을 안산캠프와 서울영어마을 풍납캠프가, 2006년 처음부터 영어마을 용도로 지어진 경기영어마을 파주캠프와 서울영어마을 수유캠프가 개원하며 본격적인 영어마을 시대가 열렸다. 서울과 경기를 시작으로 전국에 28곳의 영어마을이 세워졌다.



야심 차게 운영을 시작한 영어마을은 초기부터 적자 논란에 시달렸다. 안산영어마을은 개원 첫해 118억 적자를 기록했고, 규모가 더 큰 파주영어마을 역시 159억 원의 적자로 운영을 시작했다. 경기영어마을 대비 두 배 비싼 이용료 책정을 감수하고 민간위탁운영을 택한 서울영어마을마저도 2006년 두 캠프 통합 7억 원의 적자를 냈다.

하필 2006년에 정점을 찍은 조기유학 열풍이 이후 꾸준한 감소세로 전환하고 단기형 숙박교육의 효용에 대한 회의가 제기되며 주 수입원인 숙박교육 수요가 떨어졌다.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파주영어마을의 경우 2007년 3만3,209명의 숙박교육생이 입소했지만 2008년에는 2만7,841명, 2009년에는 1만5,000여 명으로 수요가 감소했다.

영어마을 설립 경쟁에 불을 지핀 영어 광풍이 외국어고등학교 등 특목고 입시 경쟁에도 불을 지폈다. 기존 외고의 경쟁률이 치솟고 2004년에서 2010년 사이 전국에 무려 10곳의 신규 외고가 개교했다. 학생들은 영어마을 대신 특목고 입시학원으로 더 몰렸다. 영어 광풍에 세워진 영어마을이 영어 광풍에 쓰러진 셈이다.


영어마을로 매년 270억 원의 적자가 생긴다면 향후 문제가 불거질 소지가 큽니다. 운영방식을 민간위탁방식으로 전환하고 이용료도 올려야 합니다.
김문수 당시 경기지사 당선자, 경기영어문화원 업무보고 중

경쟁적으로 영어마을을 세우던 두 지자체장이 4회 지방선거에서 교체되자 영어마을은 사실상 정책적 동력을 잃었다. 신임 경기지사로 당선된 김문수는 선거 당시부터 영어마을 직영 포기를 시사했다. 서울과 달리 낮은 요금을 고수하며 영어마을을 공교육의 일환으로 취급했던 경기도에도 큰 변화가 예고됐다.

영어마을 시대를 열었던 경기영어마을은 수차례 이용요금을 인상하고 직원을 정리해고 하는 등 고강도의 구조조정을 단행했지만 만성 적자를 면치 못했다. 비용절감 차원에서 매점 등 비교육 업무에 종사하는 원어민 직원을 내국인 근로자로 대체해 강의실에서만 영어교육을 제공해 ‘몰입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는 시설 이용 만족도를 떨어뜨려 다시 이용객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발생시켰다.

결국 ‘1호 영어마을’ 안산영어마을과 아직 개원도 하지 않았던 양평영어마을은 김문수 도정하 민간위탁으로 넘어갔다. 파주영어마을은 공교육 취지를 고려해 직영으로 존치했다.



2012년 안산영어마을 폐원을 시작으로 전국 영어마을은 하나둘 문을 닫거나 새 용도로 변경됐다. 파주·양평영어마을은 현재 경기도평생교육진흥원 소속 ‘경기미래교육’ 파주캠퍼스와 양평캠퍼스로 바뀌어 기존에 제공하던 영어교육과 더불어 진로·창의·인성교육과 가족화합캠프, 시민교육 등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이연주 경기미래교육 양평캠퍼스 행정팀장은 "초창기에는 청소년이 주 교육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가족 단위로 오는 소통캠프나 어르신들이 오는 힐링캠프, 지역 주민 누구나 올 수 있는 주말 축제도 같이 운영하고 있다"고 영어마을의 변화에 대해 설명했다.

서울 관악·노원, 경기 수원·군포, 경북 칠곡의 영어마을 역시 평생교육과 창업 관련 시설로 변해 시대에 맞는 새 간판을 달았다. 2022년 운영을 중단한 서울영어마을 수유캠프는 아직 활용 방안을 찾고 있다.

'English Only(영어만 사용)'라고 적힌 영어마을에 들어선 VR·AR(가상·증강현실) 체험장 드론 축구장이 변한 시대를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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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양평·서울= 이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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