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구가 한 말을 생각한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길에 죽은 새가 있었어. 그걸 보는데 문득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더라. 근데 우리집 개들은 그걸 보고 엄청 신이 난 거야. 냄새를 맡으려고, 물어뜯으려고, 달려들더라고.”
우리는 대화의 말미에 지구에서 인간만큼 다른 종을 사랑하는 생물이 있을지 궁금해했다. 또 다른 종의 죽음을 슬퍼하는 생물이 있는지도. '아마도 없을 것 같다'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었다.
심지어 인간은 무생물조차 사랑한다. 파손된 물건에 죽음이라는 개념을 부여하며 슬퍼하기도 한다. 지뢰 탐사로봇을 관리하던 병사가 로봇에게 이름을 붙여 주고 정이 들어, 그 로봇이 폭파될 때 슬퍼했다는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 지뢰 탐사로봇은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졌는데도 말이다. 인간이 사랑하지 못하는 대상이 없다는 게 문득 놀라웠다. 인간은 아주 쉽게 다른 존재에게 자신을 투사한다. 투사하니까 이해하고 사랑하고 슬퍼한다. 다른 존재가 되어 본다.
어쩌면 다른 존재가 되어 보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어린 시절, 좋아하던 인형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어 보던 것처럼 말이다.
조이스 캐럴 오츠의 '좀비'는 사이코패스의 시점에서 쓰인 소설이다. 일기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좀비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살아간다. 그가 말하는 좀비는 얼음송곳으로 전두엽을 절제한 사람이다. 사람의 전두엽을 절제하면 자아가 사라진다. 그는 그런 시술이 있다는 것을 책에서 보았고, 매우 흥분했다. 그리고 이제는 책의 내용을 실행해 볼 차례다. 그는 좀비가 될 대상을 물색한다. 독자는 주인공의 여정을 함께한다. 곧 좀비가 될 희생양에게 도망치라고 외치는 대신 숨을 죽이고 함께 인간을 사냥한다.
살인마의 마음에 이토록 쉽게 동화될 수 있는 건, 우리의 내면 어딘가에 살인마가 도사리고 있다는 뜻일까. 책을 읽는 동안 주인공과 살인의 여정을 함께했다고 해서 현실에서 살인마가 될 리는 만무하다. 나는 대개 선량하려고 애쓰며, 일부러 남을 다치게 하지는 않는다. 대체로 인간을 사랑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대체로 인간을 사랑하는 우리가 살인마의 여정을 거부감없이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아무래도 인간은 다른 존재가 되어 보는 것에 아무런 제한이 없는 것 같다. 심지어 거의 모든 타자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 다른 존재가 되어 보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자 유일한 재주가 아닌가 하고. 다른 존재가 되어 보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면, 문학이란 인간의 본능과 함께해 온, 참으로 본능에 충실한 장르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문학을 읽는 것은 인간의 유일한 재주다.
이 글을 쓰면서 강아지와 함께 걷던 친구를 상상한다. 그 길에 놓여 있던 죽은 새도. 그러자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어느새 나는 친구가 된다. 친구가 걸었던 산책길을 함께 걷는다. 그리고 이것이 아주 문학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