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스의 실패 아닌, '민주당의 위기'일지도... 미국 민심이 보낸 엄중한 경고

입력
2024.11.08 08:00
8면
민주당 강세 지역서 해리스 득표율
4년 전 바이든 득표율보다 낮아져
지지 기반마저 흔들... "완벽한 패배"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이 '11·5 미 대선 패자'로 역사에 남게 된 데에는 경합주(州) 7곳을 전부 빼앗긴 것이 결정타로 작용했다. 다른 주들의 경우 지역 특성상 선거 결과가 애초부터 결정돼 있었던 상황에서, 이들 7개 주에 걸린 선거인단 93명 가운데 44명만 확보하면 백악관 주인이 될 수 있었는데 단 한 곳도 승리하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해리스가 놓친 것은 경합주 표심만이 아니다. 결국 이기기는 했어도 '민주당 승리'가 상식으로 여겨지는 전통의 우세 지역에서조차 그는 상당수 유권자를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 당선자에게 빼앗겼다. 거의 모든 '블루 스테이트'(민주당 우세 지역)에서 해리스의 득표율은 4년 전 민주당 후보였던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미치지 못했고, 심지어 2016년 대선 때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트럼프 당선자에게 패했을 당시보다도 낮았다.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고 "해리스와 민주당의 완벽한 패배"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믿었던 '블루 스테이트'의 변심... 일제히 우클릭

6일(현지시간) 미국 언론들의 대선 개표 결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당선자는 민주당 지지 기반으로 꼽히는 주들에서 4년 전에 비해 크게 선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진보 진영의 아성' 캘리포니아주와 뉴욕주에서 그의 득표율은 각각 40.1%, 44.2%였다. 공화당 대선 후보가 이들 지역에서 40% 이상을 득표한 것은 2008년 이후 16년 만이다.

2020년 대선 당시 뉴욕주에서 트럼프 당선자의 득표율은 바이든 대통령보다 23.2%포인트나 낮았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해리스와의 격차는 11.6%포인트에 불과했다. 4년 전 15.8%포인트 차로 뒤졌던 뉴저지주는 5%포인트 차로 줄었고, 마찬가지로 7.3%포인트 차였던 뉴햄프셔주 역시 2.2%포인트 차로 바짝 좁혀졌다. 경합주로 분류된 조지아주와 동일한 격차(트럼프의 2.2%포인트 우세)다. '블루 스테이트'라는 분류가 무색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해리스의 승리였다. 다음 선거에서 공화당이 승기를 꽂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 된 셈이다.


"미국인, 민주당 변화 원해" 진보 아이콘의 일침

이 같은 현상의 원인을 놓고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우선 해리스 본인의 한계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선 레이스에 중도 투입돼 준비 기간이 없다시피 했고 '정권 심판론'을 키운 경제 문제에서 바이든 대통령과의 차별화에 실패했으며, 언론 인터뷰 기피 등으로 자신만의 경쟁력과 메시지를 보여 주지도 못했다는 얘기다.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로 팀 월즈 미네소타 주지사를 택한 것 역시 실책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좀 더 중도적 성향인 인물을 파트너로 택해 해리스 본인의 '짙은 진보색'을 조금은 옅게 만들어 중도층·무당파 유권자를 공략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리스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는 견해에 더 힘이 실린다. 5일 대선과 함께 치러진 연방 상·하원 선거에서도 공화당이 우세했다는 이유에서다. 후보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민주당 자체가 총체적 위기 상황이라는 진단인 셈이다.

'미국 진보의 아이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대선 패배의 결정적 원인을 "민주당이 강력한 지지 기반이었던 노동계 표심을 저버렸기 때문"이라고 이날 지적했다. 샌더스 의원은 "처음에는 백인 노동자 계층이 떠났고, 이제는 라틴계·흑인 노동자들도 떠나고 있다"며 "미국인들은 민주당에 화가 나 있고, 민주당의 변화를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해 온 유권자들에게 어필할 능력을 민주당이 상실한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중도 성향 싱크탱크 서드웨이의 설립자 맷 베넷은 "민주당이라는 브랜드에 분명히 문제가 있다"면서 "다음 선거를 위해 향후 몇 달 동안 무엇이 잘못인지에 대한 합의를 이뤄야 할 것"이라고 WSJ에 말했다.

실리콘밸리= 이서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