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트럼프 2기' 정부의 한반도 정책에서 가장 큰 변화가 우려되는 건 북한의 '비핵화'다. 트럼프는 후보 시절 기자회견에서 "전화로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비핵화는 다르다. 한미 양국은 그간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 폐기(CVID)'를 추구해왔다. 단숨에 해치우기 어려운 난제다.
반면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하는 트럼프는 다르게 접근할 가능성이 높다.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김정은과 만날 당시 '북한이 제시한 핵시설 폐기 목록이 엉터리'라며 회담장을 박차고 나간 전례가 있다. 4년 만에 재집권한 만큼 이번에는 확실한 치적을 쌓으려 북한과 비핵화 대신 핵 군축 협상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북한의 도발을 차단하기 위해 일단 핵보유를 인정하는 셈이다. 이럴 경우 핵보유국이 아닌 한국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코리아 패싱'인 셈이다.
우려는 현실화되고 있다. 미 공화당은 지난 9월 정강정책을 개정하면서 4년 전 대북정책의 목표로 제시한 CVID를 삭제했다. 공화당 측은 "비핵화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단기 우선순위를 확장억제에 둔 것"이라며 과잉해석을 경계했지만, 미국의 대북정책 원칙이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CVID 대신 군축에 힘이 실리는 건 북한 비핵화가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인식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미 80~90기, 2030년까지 최대 300기의 핵탄두(국방연구원 보고서)를 확보할 것으로 추정된다. 최용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7일 "미국 내에서는 협상을 통한 북핵 폐기에 대한 회의론이 팽배하다"고 평가했다.
이와 관련, 트럼프 2기의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후보로 거론되는 엘브리지 콜비 전 미 국방부 부차관보는 언론 인터뷰에서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도록 설득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허무맹랑하다"며 "핵연료 재처리 능력 및 농축 제한 같은, 더 이상 논의할 의미가 없는 '전통적 정책'들은 새로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미 미국에서는 핵무기 숫자를 줄이는 데 그치는 '비핵화 중간단계'가 번번이 거론됐다. 이른바 '스몰딜'이다. 비핵화의 끝장을 보지 않고 도중에 멈추는 것이다.
북한이 갈수록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는 것도 비핵화의 걸림돌이다. 지난해 9월 핵 무력강화 정책을 헌법에 명시했다. 김정은은 당시 "핵은 국가의 영원한 전략자산"이라며 "누구도, 어떤 경우에도 이를 훼손할 수 없게 해야 할 필연성을 절감했다"고 강조했다. 미 대선을 앞두고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미래의 어떤 위협에도 노선 변경은 없다"는 메시지를 반복해 보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가 성과 없이 끝난 '하노이 노딜'의 도박을 되풀이하기보다 김정은을 상대로 자신의 특기인 '거래'를 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판단할 법하다.
북미가 군축협상으로 간다면 한국의 안보는 최악의 위기로 치달을 전망이다. 앞서 트럼프가 김정은을 만날 때에 비해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은 한층 고도화됐다. 무엇보다 북한은 러시아라는 든든한 뒷배가 생겼다. 핵동결과 군비 축소의 반대급부로 북한이 얼마나 요구할지 알 수 없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한반도전략센터장은 "북한은 국제사회의 제재 완화는 물론 한미 연합훈련 중지, 미 전략자산의 전개 중단 등을 요구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나아가 주한미군 철수 또는 축소까지 거론할 수도 있다.
트럼프가 미 본토를 위협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포기를 대가로 북한의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할 경우, 확장억제로 북한에 맞서온 한미동맹은 동력을 잃는다. 이에 북한은 대미 협상력을 키우기 위해 도발수위를 높여나갈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1기 정부 당시 2018년 6월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에 앞서 6차 핵실험과 각종 미사일 시험발사로 한반도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 전례가 있다.
이에 전문가들은 군축협상을 통한 '통미봉남'(북한이 미국과 담판짓고 남한과는 대화 단절)을 막기 위해 우리가 선제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성윤 통일연구원 통일정책실장은 "지난 7년간 북한의 핵능력도 증가했지만 미국의 글로벌 전략에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도 전례 없이 높아진 만큼 트럼프가 북한이 아닌 우리를 바라보도록 만들어야 한다"며 "동맹 관리에 과감하게 자원을 투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트럼프 당선 확정 다음 날인 7일 발빠르게 전화통화한 것은 긍정적이다. 윤 대통령이 "앞으로도 한미동맹이 안보와 경제,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긴밀한 파트너십을 이어가자"고 하자 트럼프는 흔쾌히 "한미 간 좋은 협력관계를 이어가길 기대하고 있다"고 화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