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들 전쟁 결정에 민중만 고통" 고선웅 연출가가 '퉁소소리' 15년간 품은 이유 [인터뷰]

입력
2024.11.06 17:43
19면
조선 중기 한문 소설 '최척전'을 연극으로
서울시극단 '퉁소소리' 11~27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겉절이처럼 막 버무린 느낌에 한국의 미 있죠"

"이렇게 기구한 이야기가 말이 되나 싶었는데 꼭 연극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죠."

서울시극단의 단장 겸 예술감독인 고선웅(56) 연출가는 15년 전 전쟁 관련 한국 고전소설을 소개한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라는 책에서 조선 중기 문인 조위한(1567~1649)의 한문 소설 '최척전'을 접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왜란, 후금의 명나라 침입 전란기에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는 최척과 옥영 가족의 30년을 그린 대하소설이다. 고 연출가는 기이한 이야기로 치부했다가 위정자의 결정으로 민중이 고통받는 서사의 큰 틀이 오늘날에도 동어 반복처럼 이어지고 있음을 떠올렸다. 그렇게 15년간 마음에 품었던 '최척전'을 공연으로 만들었다. 이달 11~27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선보이는 서울시극단의 신작 '퉁소소리'다. 각색만 6개월 넘게 걸렸다. 제목은 주인공 최척과 아내 옥영을 재회하게 하는 매개가 한국 전통 관악기 퉁소인 데서 착안했다. 최근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고 연출가는 "최근 러시아로 파병된 북한 군인 가족에게도 슬프고 기막힌 사연이 있을 것"이라며 "정책 결정자들이 좀 더 지혜롭고 인간애가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퉁소소리'는 민중의 수난사를 절절하게 담으면서도 고 연출가 특유의 골계미가 있는 작품이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회란기' 등에서 비극과 해학의 정서를 넘나든 그는 "슬픈 일이 있을 때에도 웃긴 일이 함께 벌어지고, 웃고 있지만 눈물이 나는 게 인간사"라며 "슬픔과 기쁨의 감정이 전광석화처럼 오가는 느낌의 연극에서 재미를 느낀다"고 말했다.

'퉁소소리'는 "거친 연극"이기도 하다. 중국, 일본, 베트남 등 여러 나라와 바다, 산 등을 오가며 펼쳐지는 방대한 서사를 배우 20명이 1인 7, 8역을 소화하며 2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풀어낸다. 고 연출가는 "정교한 연출에는 정교한 만큼의 허점이 드러나게 돼 있다"며 "겉절이처럼 막 버무린 느낌에 한국의 미가 있다"고 말했다. 퉁소를 포함해 거문고, 가야금, 해금, 타악기 등 전통 국악기로 꾸린 5인조 악단의 라이브를 곁들여 한국적 정서를 극대화했다.

"더디고 장황한 연극, AI시대에도 살아남을 것"

2022년 9월 서울시극단을 맡아 예술감독으로 보낸 지난 2년은 고 연출가에게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다. '연안지대'(김정 연출), '키스'(우종희 연출), '트랩'(하수민 연출) 등 신작 번역극을 발굴했지만 창작 신작을 의뢰하고 무대에 올리기에 3년의 임기는 너무 짧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가 한국 고전을 창작에 가깝게 각색한 '퉁소소리'에 대한 기대감이 큰 이유이기도 하다. 그간은 미국 작가 마샤 노먼의 '게팅아웃',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카르멘', 입센의 '욘' 등 모두 서양 희곡을 연출했다. 그는 "관객이 '퉁소소리'를 통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삶을 살아내는 '한국의 유전자', '조선의 피'를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공간 변화가 많은 '최척전'은 영화로는 매끄럽게 옮길 수 있는 소설이지만 무대로 옮기기엔 번잡하고 장황한 측면이 있다. 고 연출가는 '블록버스터'라는 표현도 썼다.

"미련하게 보이는 이 더디고 번거로운 일을 연극인들은 인간의 실존 문제를 고민하면서 엄청난 보람과 사명감을 갖고 하지요. 인공지능(AI)이 모든 것을 대체하는 시대에도 그래서 연극의 자리는 오래갈 것으로 믿습니다."

김소연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