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가 내 꿈을 제한하도록 두지 않았다

입력
2024.11.04 04:30
23면
프랜시스 콘리(Frances K. Conley, 1940.8.12~2024.8.5)

미국 스탠퍼드대 의대 만 50세 여성 신경외과 교수 프랜시스 콘리(Frances Conley)가 1991년 6월 사표를 냈다. 여성에게 배타적이던 의대에서도 가장 마초적인 전공 분야로 꼽히던 신경외과의 개교 이래 첫 여성 레지던트(1966)이자 첫 외과 여성 교수(1977), 미국 최초 여성 신경외과 정년보장 교수(82년) 겸 정교수(86) 타이틀을 거머쥔 입지전적 인물의 돌연한 사표였다.

학교 당국이 여성 동료 및 교직원 등에게 상습 성희롱 등 성적 괴롭힘(sexual harassment)을 일삼다 두 명으로부터 고발까지 당한 남성 의사(Gerald Silverberg, 당시 53세)를 신경외과 학과장에 임명한 직후였다. 콘리는 그가 제자들이 있는 수술실에서도 자신을 '허니(honey, 자기 또는 여보)'라 부르고 “내가 다수의 견해와 다른 의견만 내도 월경전증후군이라고 비아냥거리곤 했다”고 주장했다. “그런 사람을 고위 책임자로 임명하는 것은 (…) 대학 당국이 그의 (성차별적) 태도를 정당화해 후배 세대의 남성우월주의자들을 양성하는 꼴이 될 것이다.”
LA타임스 인터뷰에서 콘리는 한 남성 동료가 그에게 "의사 가운 위로 가슴 윤곽이 드러난다"고 말하는 등 “추접스럽고 모욕적인 일들이 빈번했다”며 미국 서부 명문 의대의 이미지 뒤에 감춰진 “적대적이고 성차별적인 환경”을 작심하고 폭로했다.
사실 신임 학과장은 콘리의 레지던트 동기이자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콘리의 사표-고발 의도와 목적을 두고 당연히 뒷말이 많았다. 승진에서 밀리자 '엉뚱한 시빗거리'를 찾아냈다는 거였다. “여기서 나는 늘 찬밥 신세(dog meat)였다"던 그의 말에 선뜻 동조하는 이들도, 적어도 남성 스태프들 중에는 별로 없었다. "그런 환경에 다시 동화(사임 번복)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던 콘리는 대학 당국의 적극적인 설득과 시정 약속을 듣고 두 달 뒤 학교로 돌아갔고 학과장은 이듬해 보직 해임과 함께 1년 성인지 감수성 교육 이수 처분을 받았다.
콘리는 98년, 스탠퍼드대를 포함한 미국 의대와 병원의 성차별 실태를, 몇몇 가해자들의 실명과 함께 작심하고 폭로한 책 ‘사내아이들과 결별하기(Walking out on the Boys)’를 출간, 또 한 차례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치매 합병증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책 출간 직후인 1998년 10월, 스탠퍼드대 매거진 인터뷰에서 콘리는 91년의 사표가 ‘실용적인(pragmatic) 선택'이었다고 고백했다. 늘 불화하던 경쟁자가 상사가 되면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해진다고 판단해 전술적 수단으로 사표를 활용했다는 의미였다. 경력과 미래를 걸고 성차별주의에 맞선 페미니즘 전사라는 세간의 칭송에 부끄러워하며 평생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여겨본 적도 없었고, 학내 성차별을 겪던 여성 동료나 후배들을 적극적으로 도울 의지도 그럴 시간도 없었다고 말했다.
오히려 남자들의 마초적 장난에 적극 동조하는 편이어서, 남자들이 성적 농담을 하면 “네 고환 잘 간수 못 하면 내 메스에 잘리는 수가 있다”는 식으로 응수하기도 했다고 동료들은 말했다. “만약 내가 그들의 농담에 정색하고 반발했다면 임신을 했을 때만큼이나 빠르게 내 경력이 단절됐을 것이다. 함께 어울리며 즐겁게 지내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91년 이전의 그는 일종의 ‘유사 남성’이었고 자칭 “차별의 조력자”였다.
사표를 낸 그는 자기도 도와달라며 찾아온 여성 후배들의 더 심각하고 경악스러운 경험담을 들어야 했다. ‘플레이보이’ 잡지 나체 사진을 펼쳐 들고 수업을 진행한 교수 사례는 약과였다. 여학생에게 ‘정자 기증자’가 되어주겠다고 농담한 정년 보장 교수, 그 농담을 재미있어하며 따라하던 레지던트들. 전공 선택 과정에서 대놓고 ‘남성 유전자’가 없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준 사례, 성적 제안을 거부했다고 노골적으로 보복한 사례 등등.
콘리는 “불의에 비분강개해 혼자 떨쳐 일어난 듯 굴었던 나 자신이 기회주의적인 바보처럼 느껴졌다. 나보다 훨씬 취약한 위치에서 자신의 미래를 걸고 내 곁에 함께 서준 그들 덕에 나는 갑자기 신뢰를 얻었던 거였다”고 책에 썼다.

프랜시스 콘리(Frances K. Conley, 1940.8.12~2024.8.5)는 캘리포니아 팔로앨토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교수(지구화학)로 있던 스탠퍼드대 캠퍼스를 놀이터 삼아 자랐다. 어머니는 콘리 등 네 남매를 키운 뒤 고교 교사로 일했다. 콘리는 “자유주의적이고 평등하고 학구적인 분위기 속에서” 결핍 없이 성장했지만 오빠가 생일 선물로 생명보험 증서를 받을 때 그와 자매들은 재봉틀을 받은 일을 기억했다.

그는 명문 여대인 브린모어대(Bryn Mawr College)를 2년 다닌 뒤 교직원 자녀 장학금을 주던 스탠퍼드대(생물학)로 편입해 프리메드(pre-med) 과정을 마치고 61년 의대에 입학했다. 외과 인턴 당시 한 남자 교수가 유독 자기를 응시하며 “외과 수련의 과정을 마친 여성은 있지만 외과 의사가 된 여성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콘리는 훗날 미국립보건원 홈페이지에 실린 ‘의학의 얼굴을 바꾼 사람들’ 프로필에 이렇게 썼다. “나는 의도적으로 시스템을 거스르며 현 상태에 도전한 게 아니라 그냥 수술에 매료됐다. (...) 수술방의 환한 조명, 멸균된 기구들의 공간, 삶과 죽음의 드라마, 압박감 속에서도 단호하고 냉정한 마법의 손을 지닌 사람들, 그 세계와 사랑에 빠진 거였다.”

외과에서도 그나마 여성에게 덜 배타적이던 성형외과를 염두에 뒀던 그는 이내 신경외과로 궤도를 선회했다. “마비된 환자를 걷게 하고 뇌졸중으로 말 못 하던 환자의 말문을 터주고 뇌종양 환자에게 여분의 시간을 선사하는 삶”을, 다시 말해 훨씬 도전적인 삶을 그는 원했다. 브린모어에서 “내 능력으로 못할 게 없다는 걸 배웠”고 성적도 탁월했던 그는 66년 스탠퍼드 의대 개교 이래 첫 신경외과 여성 수련의로 선발됐다. 그는 “내가 그 예외적인 그룹의 일원이 된 게 너무 기뻐서 1년 동안 물구나무서서 다닐 수도 있을 것 같았다”고 책에 썼다. 학부 때 만나 63년 결혼한, 56년 올림픽 투창 국가대표 겸 하버드대 MBA 출신 필 콘리(Phil Conley)와의 신혼 기간이었다. 결혼 3주년 기념일 밤 11시에 녹초가 돼 귀가했다가 부엌에 샴페인을 놓아둔 채 소파에 잠들어 있던 남편을 보곤 하던 나날이었다. 부부는 콘리의 뜻에 따라 자녀를 낳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렇게 고군분투하며, 틈만 나면 남편과 조깅을 하거나 투창으로 남자들에게 밀리지 않을 체력을 다지며, 악착스레 경력을 쌓아갔다. 신경외과 명예교수 존 애들러(John Adler)는 “미국 최초 신경외과 여성 전문의로서 그는 누구보다 자주 주변의 회의론과 직면해야 했을 것이다. 그는 투사였고, 투사여야만 했다”고 말했다.

콘리에겐 또 하나의 ‘최초’ 기록이 있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베이 브레이커스 7마일(10km) 마라톤 대회’에 여성이 출전할 수 있게 된 1971년 첫 여성 부문 우승자였다. 당시 지역신문은 그를 ‘팔로앨토의 주부’라고 소개했다. 사실 그는 몇 년 전 후드 재킷으로 얼굴을 가린 채 ‘Francis’란 남자 이름으로 그 대회에 출전해 완주한 적이 있었다. 미국 최초 대학병원 신경외과 테뉴어 교수가 된 1982년 8월, 그는 잡지 ‘Time’의 커버스토리 ‘아름다움의 새로운 이상(The New Ideal Of Beauty)’에 당시로선 꽤 도발적인(skimpy) 반바지 운동복 차림의 사진과 함께 실렸다. 만 42세의 그는 “일주일에 한 번 메스 대신 창을 드는 (…), 성공적인 커리어를 유지하면서도 육체적으로 활동적인 여성”으로 소개됐다.

도전적이고 성취지향적인 그에게 91년 학과장 인사는 ‘유사 남성’의 난한 농담으로는 결코 돌파할 수 없는 난관이었을 것이다. 그의 ‘사표’와 고발을 개인적 출세를 위한 히든 카드쯤으로 폄하하거나 미심쩍게 여긴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한 간호사는 98년 대학 잡지 인터뷰에서 “그가 좋은 지적을 많이 한 건 맞지만, 여성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언제든 성차별 카드를 꺼내 들 수 있다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간음을 한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지려던 무리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했다는 요한복음 속 예수의 말은 죄가 들통나 처벌을 받게 된 성직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라고 한다. 신학자들은 구약의 엄한 율법보다 회개와 구원의 사역을 중시한 예수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해석한다지만, 그 구절은 고발자의 순결성을 전제하는 소위 ‘피해자성’ 이데올로기의 원관념처럼 '오독'되기도 한다. 하지만 가까이 있는 낮은 언덕에 가려 보이지 않아도 멀리 있는 높은 산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듯 고발자의 흠집으로 불의를 가릴 수는 없다.

콘리는 98년 책을 통해 ‘미심쩍은 동기’와 부채의식을 떨치고 더 과감하고 직설적으로, 의료계의 만연한 성차별적 관행을 고발했다. 대학 당국은 시종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훗날 조지 부시 정부의 국무장관을 지낸 당시 스탠퍼드대 교무처장 콘돌리자 라이스는 “프랜은 많은 일을 겪었고 헤쳐나왔고 성취했다. 이 책도 또 하나의 승리다”라고 '개인적' 소감을 밝혔다. 콘리는 북콘서트 등을 통해 독자들과 만났고, 스탠퍼드대 교내 서점에서도 사인회를 가졌다.
그는 대학병원 신경외과장은 못 됐지만, 교수평의회 의장과 의대 협력병원인 팔로앨토 베테랑클리닉 신경외과장 등을 역임하고 2000년 정년퇴직했다.

클래런스 토머스 연방 대법원 판사 지명자의 직장 내 성희롱을 고발한 오클라호마대 로스쿨 교수 애니타 힐 의회 청문회가 1991년 10월 시작됐다. 전원 백인 남성이던 상원 법사위원들의 모욕적인 질문도 모자라 거짓말탐지기 테스트까지 받아야 했던 힐의 공개적 수난에 페미니즘 진영은 분노로 결집했다. 페미니즘 제2의 물결의 주역인 앨리스 워커(Alice Walker)의 딸 레베카(Rebecca Walker)가 ‘제3의 물결’이란 선언적 표현을 처음 쓴 게 그 무렵이었다. 미국여성사박물관은 힐 청문회와 함께, 그해 결성된 페미니스트 여성 펑크 록 그룹 ‘라이어트 걸(Riot Grrrl)' 등이 주도한 세계적 여성 대중문화 운동을 페미니즘 제3의 물결의 시작으로 평가했다. 킴벌리 크렌쇼의 89년 ‘교차성’ 개념이 페미니즘 이론과 본격적으로 결합한 것도 저 무렵이었다. 콘리의 삶의 궤적은 젠더 권력 지형의 복잡한 중첩성(교차성)을 보여주는 꽤 전형적인 사례라 할 만했다.
주목하는 이는 많지 않지만, 애니타 힐 청문회에 앞서 콘리의 폭로가 있었다.

은퇴 후 콘리는 남편과 함께 소노마 카운티의 조용한 바닷가 마을 시랜치(Sea Ranch)로 이사, 반려견과 함께 조깅 등을 즐기며 가끔 마을 병원에서 의료봉사를 했다. 부부는 의대 제자들, 특히 여성과 스포츠 커뮤니티에서 인연을 쌓은 학생들을 후원했다. 2018년 스탠퍼드대 최초 흑인 신경외과 교수이자 콘리 이후 36년 만에 처음 임용된 여성 교수인 오데트 해리스(Odette Harris)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해리스는 “콘리가 없었다면 내 경력도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의대 입학생 중 여성은 2017년을 기점으로 50%를 넘어섰고 22년 55.6%가 됐다. 신경외과는 피부과 성형외과와 함께 지금도 가장 경쟁이 치열한 전공 분야으로 꼽힌다. 미국여성신경외과학회(WINS)는 여성 신경외과 의사 비율이 5.9%에 불과하던 2008년 백서를 내고 2020년까지 그 비율을 20%로 끌어올리겠다고 선언했다. 2021년 그 비율은 8.2%에 그쳤다. 콘리를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했던 UCLA 여성 신경외과장 린다 리아우(Linda Liau)는 “여성이 신경외과에 진출하는 데는 지금도 장애물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일을 정말 좋아하면 넘지 못할 허들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콘리가 걸어온 길, 그가 98년 책에 썼던 말이 그거였다. “나는 다른 사람이 내 꿈을 제한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