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 부실수사의 극치... 수기사 '염순덕 상사' 유족에 국가배상

입력
2024.10.28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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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위·중사와 회식 후 머리 손상 사망했으나
군은 국과수 감정 무시, 범행도구도 분실해
결국 범인, 사망 경위 못 밝히고 미제로 남아

군 부사관 살인의 유력한 용의자가 있었음에도 헌병대의 부실한 초동수사로 인해 그 실체가 전혀 규명되지 못했던 미제 사건. 2001년 수도기계화보병사단(수기사)에서 사망한 고 염순덕 상사 유족에게 국가의 배상이 이뤄져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민사 재판부는 "군 수사기관의 부실 수사로 인해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고 질타했다.

28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7부(부장 손승온)는 염 상사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는 총 9,000만 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18일 선고했다. 재판부는 "유족들은 가장이 살해됐음에도 누구로부터도 사죄와 합당한 배상을 받지 못했다"면서 "오랜 시간이 지나 유력한 용의자들이 발견됐음에도 초동수사의 증거 확보 미흡 등으로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고 밝혔다.

2001년 12월, 당시 34세였던 염 상사는 수기사 포병여단 본부포대 소속 군수담당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부대 회식 후 같은 부대 수송관 A준위, 국군기무사령부 소속 B중사 등과 술을 마신 후 귀가하던 길에 사망했다. 맨 처음 헌병대는 뺑소니 사고로 봤지만, 경찰 수사 끝에 사인은 외상성 두부 손상 및 안면부 손상으로 밝혀졌다.

사건 현장 인근에선 염 상사의 피가 묻은 대추나무 몽둥이가 발견돼 폭행 정황이 확인됐다. 담배꽁초도 나왔는데, 사건 발생 몇 달 뒤 여기서 A준위와 B중사 유전자가 검출됐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도 헌병대는 담배꽁초가 수사 단서로서 효력이 없다고 보아, 사건 시간에 같이 당구를 치고 있었다던 A와 B 두 사람의 진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살해도구인 대추나무 몽둥이는 헌병대가 보관하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분실됐다.

이 사건은 15년이 지난 2015년 7월, 살인사건 공소시효가 폐지된 '태완이법'(대구 어린이 황산 테러 피해자의 이름을 딴 법)이 시행되며 경찰의 재수사 대상이 됐다. 경찰은 알리바이 조작을 확인하고, 두 사람을 입건했다. 하지만 수사 재개 뒤 B중사는 차 안에 번개탄을 피워 사망했다. A준위는 기소 의견으로 2018년 송치됐지만, 검찰은 피의사실을 인정할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유족들은 "수사기관의 부실한 수사 때문에 오랜 기간 사건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보훈보상 대상자 인정이 지연돼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유족은 염 상사의 국가유공자 등록을 신청했지만, 보훈심사위원회는 직무수행 등 인과관계로 사망했다는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았다. 유족들은 관련 소송도 따로 진행 중이다.

결국 재판부는 △수사기관의 잘못으로 현재까지도 범인, 살해 경위 및 동기 등이 규명되지 않은 점 △그 결과 장기간 보훈 대상자로도 선정되지 않은 점을 고려,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헌병대의 부실수사를 두고는 "A준위와 B중사 수사 진행에 상당한 부담을 가진 것으로 보이고, 수사를 진행하지 않으려고 담배꽁초 유전자 감식 결과의 증거가치를 의도적으로 평가 절하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근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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