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올해 3분기(7~9월) 사상 최대 실적을 낸 데 이어, 연간 영업이익에서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문(DS·디바이스솔루션)을 뛰어넘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회사 창립 이래 최대 실적을 잇달아 내면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경영 감각과 투자 스타일이 주목받고 있다.
27일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올해 3분기 사상 최대인 영업이익 7조300억 원을 기록, 반도체 슈퍼 호황기였던 2018년 3분기(영업이익 6조4,724억 원) 기록을 6년 만에 갈아치웠다. 세계 1위 메모리 업체인 삼성전자 DS부문의 3분기 영업이익 시장 전망치(4조, 5조 원)를 크게 웃돈다. SK하이닉스가 고대역폭메모리(HBM),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eSSD, 데이터 기억 장치) 등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으로 판매를 늘린 데 반해 삼성전자는 수요가 둔화한 레거시(범용) 메모리 판매 비중이 크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적자도 길어진 탓이다.
이런 흐름을 타고 SK하이닉스 연간 영업이익이 삼성전자 DS부문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SK하이닉스의 올해 영업이익 컨센서스(증권사 전망치 평균)는 23조5,743억 원이다. 반면 삼성전자 DS부문의 올해 연간 영업이익 전망치는 평균 18조 원대에 그친다.
인공지능(AI) 산업의 미래를 내다본 안목과 뚝심 있는 투자가 AI 메모리 1등 기업을 만들었다는 평가다. SK그룹은 2012년 반도체 불황으로 생존의 기로에 있던 하이닉스를 인수했다. 당시 하이닉스는 채권단 관리를 받으며 연간 2,000억 원대 적자를 내던 부실기업이었다. 인수를 중도 포기했던 효성, 현대중공업, STX 등이 승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최 회장이 "나를 믿어달라"며 인수를 반대한 임원들을 끈질기게 설득한 건 유명한 일화다.
반도체는 고(故) 최종현 선대회장이 선경 반도체를 세우며 진출을 추진했지만 제2차 오일쇼크로 무산된 경험이 있는 분야다. 최 회장은 2010년 반도체 공부 모임을 시작했고 이 모임을 통해 SK하이닉스 인수의 실익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 회장은 인수 직후부터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한 전 분야를 대상으로 대대적으로 투자했다. 매년 조 단위의 연구개발비를 투입했고 신규 공장도 잇따라 지었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은 5월 기자간담회에서 "SK그룹에 편입된 게 2012년인데 그 때부터 메모리 업황이 좋지 않아서 대부분 반도체 기업이 투자를 10% 이상 줄였지만 SK그룹은 투자를 늘리는 결정을 했다"며 "거기에는 시장이 언제 열릴지 모르는 HBM 투자도 포함됐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투자의 '방향'이 탁월했다는 평가가 많다. AI 산업의 미래를 내다본 투자로 HBM, eSSD 등 AI 메모리를 제때 내놓을 수 있었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SK가 SK텔레콤 등 계열사 사업을 통해 AI 산업의 파급력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SK하이닉스에 남들보다 먼저 투자를 감행한 게 주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삼성전자는 생성형 AI의 파괴력을 가늠해볼 만한 사업군이 없었고 이 때문에 AI반도체 투자 시기를 놓쳤다는 해석이 나온다.
'HBM 성공 신화'는 SK그룹 인수 이듬해 시작했다. 2013년 세계 최초로 실리콘관통전극(TSV)과 웨이퍼 레벨 패키지(WLP) 기술을 바탕으로 개발한 1세대 HBM이 나왔다. 고성능 컴퓨팅 시장이 무르익지 않아 큰 반응은 없었지만 회사는 멈추지 않고 후속 기술 개발에 힘을 쏟았고 2022년 생성형 AI 등장 이후 IT 산업 중심이 AI로 옮겨가면서 10년 만에 대박을 터뜨렸다. SK하이닉스는 HBM3(4세대)를 엔비디아에 공급하면서 AI 메모리 1위 업체로 발돋움했다. SK하이닉스는 10일 자사 뉴스룸에 창립 41년을 자축하며 "(올해) '르네상스 원년'을 만들어가고 있고 그 배경에 HBM, 지능형반도체(PIM), 컴퓨트 익스프레스 링크(CXL) 등 첨단 공정과 패키징 기술이 집약된 AI 메모리가 자리 잡고 있다"고 밝혔다.
국내 주요 대기업 문화가 뒤섞인 SK하이닉스의 독특한 노사 관계가 위기 때 힘을 발휘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SK하이닉스는 ①1999년 기업 간 빅딜로 현대전자가 LG반도체를 품고 ②다시 왕자의 난으로 현대그룹이 쪼개지며 2001년 채권단에 넘겨져 ③하이닉스반도체로 사명이 바뀌었다가 2012년 SK그룹에 인수됐다. 여러 기업의 손을 거치며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경험해 본 노조가 반도체 혹한기에는 스스로 임금 동결을 선언하고 회사는 격려금으로 화답한다. 경기 이천시, 충북 청주시의 SK하이닉스 공장 생산직 직원의 노조 가입률은 각각 99%(2023년 기준)에 이르지만 파업은 한 번도 한 적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