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자연이 담긴 풍경화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곳곳에 비밀스러운 문화 코드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당시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일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부자연스럽게 보이기 때문에 풍경화 속엔 읽을 것이 넘쳐 난다. 미술의 매력에 푹 빠지게 해 줄 풍경화 명작을 골라 10회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서양의 풍경화를 주로 살펴봤는데, 이번 글에서는 한국의 전통적 풍경화, 즉 산수화를 다루고자 한다. 한국 전통 회화에서 산수화는 자연을 담는다는 점에서 서양의 풍경화와 형식적으로 일치한다. 물론 세부나 사상적 배경에서는 차이점도 많으나, 일단 유형적으로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해 서양미술사적 관점으로 한국의 산수화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먼저 한국을 대표하는 역사적 산수화 2점,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보자. 몽유도원도는 일본 덴리대에 소장돼 있다. 1996년 호암미술관의 '조선 전기 국보전'과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의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 전시를 위해 두 번 한국으로 건너온 것을 제외하면 실물을 직접 보기 어렵다. 이와 달리 인왕제색도는 이건희 컬렉션을 통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면서 대중에 자주 공개되기에 더욱 가깝게 볼 수 있는 작품이 되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문학평론가이자 이론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은 저서 '언어의 감옥' 서문에서 "생각의 역사는 생각 모델의 역사"라고 주장했다. 하나의 생각 모델은 흥망성쇠를 겪으며 스스로 정비하고 보완하다가 이윽고 새로운 생각 모델로 교체된다. 그리고 생각 모델의 교체는 생각의 절대적 단절이라고 부를 만큼 큰 사건이다. 흥미롭게도 몽유도원도는 1447년, 인왕제색도는 1751년에 그려진다. 300년 시차가 있는 두 작품은 조선 전기와 후기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두 그림을 나란히 놓고 보면 조선시대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일 수 있는 그림인가 싶을 만큼 산수, 즉 산과 강의 표현이 너무나 다르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을 직접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 생각이 담긴 글과 말 그리고 특히 미술을 통해 그들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다. 몽유도원도와 인왕제색도의 표현 차이는 시간적 거리만큼이나 그림이 그려졌을 당시 사람들의 생각 변화도 컸다는 점을 짐작하게 한다. 그 차이는 제임슨이 이야기한 생각 모델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몽유도원도가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직후인 조선 전기 1444년 전후의 문화 발전기 사고 체계를 보여준다면, 인왕제색도에서는 영정조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문화적 전성기의 사고 체계를 보여준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1447년 음력 4월 20일에 꿈속에서 도원을 여행한 후 그 내용을 안견으로 하여금 그리게 한 것이다. 왼편 하단부에서 오른편 상단부로 대각선을 이루며 이어지는 특이한 이야기 전개법, 왼편으로부터 현실 세계의 야산, 도원의 바깥 입구, 도원의 안쪽 입구, 도원으로 구분되는 따로 떨어진 경관들의 조화, 고원과 평원의 강한 대조, 도원의 넓은 공간, 환상적인 산들의 기이한 형태가 담겼다.
몽유도원도는 세로 38.7㎝, 가로 106.5㎝로 좁고 긴 두루마리 형태의 그림으로 서양의 스크롤과 유사하다. 이 그림에는 독특한 읽는 법이 있는데 가로로 긴 그림 전체를 펼쳐두고 한 번에 보는 대신 두루마리를 우리 눈의 시선 범위인 대략 30cm 정도만 펼쳐 둔 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펴고 감아가며 마치 파노라마 사진처럼 그림의 장면을 부분씩 차례대로 본다. 이런 독특한 방식으로 그림을 감상하면 한 번에 볼 때와는 색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전통회화에서 산수화를 감상하는 방법 중에 '와유(臥遊)'라는 방법이 있다. 와유란 '누워서 즐긴다'라는 뜻으로, 집에서 명승이나 고적을 그린 그림을 보며 즐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몽유도원도를 와유하듯 보면 마치 동영상을 보듯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시선이 옮겨진다. 간간이 시선을 안내해 주듯 오솔길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렇게 안견이 표현한 풍부한 시각 세계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면 오른쪽의 무릉도원을 만나게 된다. 무릉도원과 빈 배가 그려진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경치가 정말 꿈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느껴지는 평화로움은 당시 안평대군이 수양대군과의 정치적 긴장 관계에 대한 스트레스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조선 전기의 독창적인 그림이지만 화풍에 있어 북송의 곽희로부터 이어 온 곽희파와 깊은 영향 관계가 있다. 조선 전기의 대가인 안견은 곽희의 화풍을 토대로 남송의 마하파 화풍 등 다양한 화풍을 종합해 독자적인 화파를 이루었다. 따라서 곽희의 조춘도와 양식의 친화성이 있으면서도 독자적 화풍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그림이 그려진 당시 조선 전기의 문화적 배경을 읽어낼 수 있다. 중국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독자적 문화를 전개했던 그들의 사고 체계가 그림에 담겨 있다.
몽유도원도가 그려지고 300여 년 지난 후에 그려진 인왕제색도에서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풍긴다. 인왕제색도를 비롯한 정선의 그림은 눈에 보이는 진짜 풍경으로 시대적 진실을 담으려 했다는 의미로 '진경' 산수화라는 개념으로 다뤄진다. 최근 연구 경향으로는 진경(眞景) 대신 실경(實景)이라는 용어를 더 자주 사용하는데, 이는 실제 풍경을 담아냈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 산수화에 실제 풍경이 등장한 기원을 따지자면 금강산 그림이 등장하는 고려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본격적으로 양적으로 풍부해지는 시기는 대략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무렵이다. 서양 미술의 경우 실경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에, 동서양 회화에서 실경은 시기적으로 매우 비슷하다. 예를 들어 인왕제색도는 지난 시리즈에서 다루었던 1689년에 그려진 메인더르트 호베마의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길'과 나란히 놓고 볼 만한 한국의 실경 산수화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한국도 인왕제색도 같은 실경 산수화를 통해 시각 세계의 근대화에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서양 미술에서 실경은 단순히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시간적 변화와 대기적 효과까지 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점에 있어서 인왕제색도는 서양미술의 실경에 매우 잘 맞아떨어진다.
미술사학자 오주석의 연구에 의하면 인왕제색도가 그려진 시기를 통해 당시 날씨 등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작품 오른쪽 상단에는 신미윤월하완(辛未閏月下浣), 즉 신미년(1751년) 윤달(윤5월) 하순에 제작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 시기의 승정원일기를 보면 윤5월 19일부터 25일까지 장맛비가 내리다 25일 오후에 완전히 개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정선이 25일 오후에 비 갠 인왕산을 실제로 보고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그림에서 표현된 산골짜기 사이로 흐르는 운무의 대기 효과, 비에 젖어서 검게 진해진 인왕산의 화강암 바윗돌을 볼 수 있다. 이는 정선이 그저 인왕산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려진 시기와 시간, 계절감, 습도까지도 그림에 담아낸, 서양의 어느 그림하고도 뒤지지 않는 실경이라는 영역을 그려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미술사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 그림의 가장 큰 쟁점은 그림 속 집의 주인공이 누군가에 대한 논쟁이다. 대표적으로 정선의 절친한 벗이었던 임종을 앞둔 대시인 사천 이병연을 위한 그림이며 그림 속 집 또한 이병연의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서양미술사학자인 필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75세라는 노년에 그린 대작인 인왕제색도의 전경에 놓인 커다란 집은 화가 자신의 집으로 보인다. 겸재 정선은 자신이 평생 이뤄 놓은 세계에 대한 증거물로 자신의 집을 멋지게 그려 넣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조선 전기의 몽유도원도와 조선 후기의 인왕제색도는 각자의 개성으로 당시의 시대와 생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지금은 몽유도원도를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없지만 언젠가 두 그림이 나란히 전시되어 두 그림 사이의 300여 년을 오고 가며 조선의 산수화, 풍경화에 담긴 과거의 생각을 살펴볼 기회가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