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중 성추행 의혹' 풍자 연극 대본 정부가 수정 강요… "연출가에 배상하라"

입력
2024.10.20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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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 문체부, 국립극단 작품 검열
당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도 포함

박근혜 정부 첫 청와대 대변인이었던 윤창중씨 성추행 의혹을 풍자하는 연극을 준비하다가 정부로부터 내용 수정을 강요당한 연출가에게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해당 작품이 포함된 3부작 무대는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도 포함됐던 것으로 파악됐다.

20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50단독 최미영 판사는 A씨가 국가와 국립극단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16일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A씨가 청구한 1억 원 중 2,500만 원을 국가와 국립극단이 공동 배상해야 한다고 했다.

국립극단은 2013년 9월 그리스 시인 아리스토파네스의 대표작을 선보이는 희극 3부작을 상연하고 있었다. 첫 번째 작품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하하고 국가정보원의 선거개입 사건을 풍자하는 내용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자, 문화체육관광부는 직접 결말 수정을 지시했다.

A씨의 다음 작품도 검열 대상이 됐다. 그는 그해 5월 방미 사절단으로 미국을 방문한 당시 청와대 대변인 윤창중씨가 주미 한국대사관 인턴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을 다루려 했지만, 상연 2주 전 예술감독을 통해 붉은 줄이 그어진 대본을 전달받았다. 관련 대사를 고치라는 뜻이었다.

이 사건의 내막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이었던 2016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확인됐다. 이듬해 10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 위원회는 문체부 공연전통예술과가 2013년 국립극단의 아리스토파네스 3부작에 대한 조치 사항을 정리한 문건을 공개했다.

사건 발생 9년 만에 제기된 소송에서 법원은 A씨 손을 들어줬다. 정부와 국립극단의 사전 검열 행위는 헌법이 보장하는 예술∙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불법행위라는 취지다. 문건에 따르면 당시 문체부가 다른 연극에 대해서도 유사한 조치를 취할 의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도 법원은 판단했다.

재판부는 "문체부와 극단의 행위는 건전한 비판을 담은 창작활동을 직접 제약하는 것으로서 적법 절차를 준수해야 할 공무원의 의무를 심각하게 위반해 통상 발생하는 공무원의 불법 행위와는 차원이 다르다"며 "예술에 대한 국가의 중립성에 관한 문화예술계의 신뢰도 훼손했다"고 질타했다.

최다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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