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게 보고할 게 있습니다."
지하철 역에서 우연히 만난 부원이 길을 막았다. 약속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처음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살인 피해자 유족을 사건 담당 기자와 함께 취재해도 되냐는 게 요지였다. 사건 자체는 경제부 영역이 아니지만 제도의 허점을 짚고 싶다고 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몇 가지 당부와 함께 허락했다. 며칠간 장문의 보고가 개인 메신저에 올라왔다. 부연하는 전화도 이어졌다. 부원의 글과 말을 관통하는 취재와 보도 사이 '고심'과 '우려'가 각인됐다.
한국일보가 최근 보도한 '김레아 사건 그 후(8일 자 1, 8면)'는 참척과 중상해로 삶이 무너진 한 엄마의 서사에 집중한다. 6개월 전 눈앞에서 딸이 살해된 끔찍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는 않았을 게다. 종일 거실에 멍하니 누워 있다는 그가 언론 인터뷰에 처음 응한 동력은 '이번만은 후회하지 않겠다'는 결심이리라.
돌이켜 보니 가난이 후회를 낳았다. "눈 수술해서 승무원 시켜 줄걸." "미국 유학 보내 줄걸." "그 놈 손 안 빌리고 방 구해 줄걸." "변호사 구해서 교제폭력 신고할걸." 홀로 딸을 키우는 형편이라 중요한 선택의 순간마다 돈이 발목을 잡았다고 했다. 구구절절 직접 듣지 못했으나 기사에 담지 못한 어머니의 한탄에 말문이 막혔다.
이번에도 돈이 문제다. 강력 범죄 피해자의 유족에게 주는 유족구조금은 몰상식하고 무정했다. 건조한 법 조문은 유족의 처지를 살피지 않았다. 예컨대 이렇다. '유족구조금은 구조 피해자가 사망했을 때 맨 앞의 순위인 유족에게 일시금으로 지급하며, 순위가 같은 유족이 2명 이상이면 똑같이 나눠 지급한다(범죄피해자보호법 17조 1항 및 2항).'
이 조항을 이번 사건에 적용하면 외도로 20여 년 전 이혼한 뒤 연락 한 번 없던, 주지 않은 양육비가 쌓여 2,000만 원 넘게 밀린 생부가 유족구조금의 절반을 받게 된다. 달리 말해 평생 양육하고 동고동락한 엄마는 '순위가 같은 유족'이라 유족구조금의 절반을 받았다. 개인정보 보호 때문에 생부의 유족구조금 실제 수령 여부는 끝내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 자체로 잘못됐다. 엄마는 구조금을 매개로 생부가 범인과 합의 같은 것을 시도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이런 '패륜 아빠'를 생물학적 부모라는 이유로 '순위가 같은 유족'에 분류한 조항은 당장 고쳐야 한다. 양육 의무를 저버리거나 정신적·신체적 학대를 한 부모는 자녀 사망 시 상속을 제한한 민법 개정(구하라법)의 선례도 있지 않은가.
기사에서 지적했듯 △피해자 경제 수준에 따라 구조금액 책정 △뺄셈투성이 산식 △홍보 등 간접비의 3분의 1 수준인 직접 지원 △감형에 미치는 영향 등 유족구조금제도는 따져볼 부분이 여럿 더 있다. 순방 예산이니 쪽지 예산이니 낭비를 줄여 범죄 피해자 및 유족을 돕는 예산을 늘렸으면 한다. 그것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마중물이다.
고통이 앗아간 용기를 쥐어짠 엄마가 지면을 빌려 호소한다. "그때는 몰랐어요. 법이, 제도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줄은… 딸이 살아 돌아올 수 있다면, 김레아를 엄벌할 수만 있다면 안 받고 싶어요. 딸 목숨과 맞바꾼 그 돈, 제가 어떻게 받아요. 근데 딸에게 해 준 것 하나 없는 아빠한테 유족구조금이 간대요. 그것만은 정말 막고 싶어요." 정부가 답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