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순·선경 롱게스트=빌런' 구도 짜고 악플은 "견뎌라"...화제성이 사람 잡는다

입력
2024.10.2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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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요리사' 인기 높지만, 일부 셰프 악플 피해
넷플릭스는 성과만 홍보, 출연자 보호 묻자 "..."

'나는 솔로' 3년 간 악플...'기수별 빌런 모음'까지
PD "담대하게 견디시라" 고통은 출연자 몫

10년 간 반복돼온 '악당' 만들기→시청률 상승
"방송 내용 사전 고지, 제작진도 악플 대응해야"

#. “한국인들에게 사이버불링(온라인 괴롭힘)을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불행히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넷플릭스 요리 경연 프로그램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에 출연한 요리사 선경 롱게스트(41)가 최근 악플 피해를 호소하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쓴 글이다. 그가 유튜브 채널에 올린 영상 하나에만 그의 가족, 국적 등을 조롱하는 악플이 8,000개 넘게 달렸다. 다른 셰프들과 협업하는 대결에서 혼자 다른 의견을 냈다는 게 이유다. 다른 출연자들 역시 말 한마디 때문에 “거만하다” 등 온갖 악플에 시달렸다.

#. “(저를) 보고싶지 않으시면 방송사에 항의 부탁드려요. 이런 DM(다이렉트 메시지)은 그만 보내주세요. 잠을 잘 수가 없어요.”

SBS 플러스·ENA에서 방송 중인 프로그램 ‘나는 솔로’ 22기 ‘옥순’이 지난 16일 SNS에 올린 글이다. 그는 지난달 “제 인성을 욕하실지언정 엄마로서, 미혼모로서의 제 모습은 욕하지 말아주셨으면 한다”고 악플 중단을 호소했지만 3주 넘게 악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방송에서 이기적이었다는 게 악플의 이유. 같은 22기 ‘순자’ 역시 외모 비하, 성희롱 악플에 법적 대응 중이다.


‘천하제일 빌런대회’ 만들고는, 출연자 고통 "난 몰라"

기시감이 든다. 10여년 전 비(非)연예인들이 나오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인기가 치솟을 때부터 반복돼온 패턴이다. 특정 언행이 강조되며 ‘악당’처럼 그려진 출연자는 방송 공개 후 거센 비난을 받았다. ‘악당’은 시청률을 끌어올렸고, 시청률이 오를수록 공격 수위도 높아졌다. 일부는 악플러를 고소했고, 소수는 제작진의 ‘악마의 편집’에 반발했지만, 대부분은 홀로 고통을 감내했다. 편집과 자막으로 출연자들의 '악당' 캐릭터를 만든 제작진은 온데간데 없었다.

넷플릭스도 마찬가지다. 선경 롱게스트 등 일부 출연자들이 악플에 시달리고있지만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 한국 예능 최초로 3주 연속 넷플릭스 TV 비영어 부문 1위 기록 등 ‘흑백요리사’의 성과 홍보에만 급급했다. 넷플릭스 측은 '일반인 출연자 보호 규정이 있느냐'는 한국일보의 질문에 “상황에 따라 출연자 보호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내놨다. ‘흑백요리사’ 악플 피해자들에게 어떤 지원을 했는지는 답하지 않았다.

‘나는 솔로’는 방송 3년간 악플의 늪이었다. '기수 별 빌런(악당) 모음'이 나올 정도로 매 에피소드마다 악인을 등장시켰기 때문이다. 출연자들은 “욕설을 한 적이 없는데 마치 한 것처럼 ‘X’로 묵음 처리됐다”, “‘미친 여자’ 프레임에 외출도 못했다. (회당 출연료) 400만원에 한 아이의 엄마를 사지로 몰며 수익을 창출했다”, “‘천하제일 빌런대회’보다는 남녀 감정과 서사의 변곡점 등을 잘 묘사했으면 좋겠다”며 제작진을 공개 비판했다. 하지만 제작진은 침묵했다. 악플 피해에 대해 남규홍 ‘나는 솔로’ PD는 “(출연자들에게) 담대하게 견디시라는 말밖에 할 수 없어 안타깝다”고 선을 그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과거 일반인 예능 출연자가 악플로 자살하는 등 문제가 반복되자 출연자 보호 목소리가 계속돼왔다”며 “하지만 제작진은 프로그램 인기와 화제성을 위해 ‘악당 만들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제작진 20세기 마인드...출연자 권리 보호 규정 필요"

제작 관행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편집이 끝나도 출연자에게 방송 내용을 사전에 알려주지 않는 것이 오랜 관행이고, 제작진이 촬영 전 출연자에게 설명한 방송의 방향과 실제 내용이 다른 경우도 많다. 프로그램이 방송된 후 다시 보기 어려웠던 과거와 달리, 영상이 무한 재가공·재방영되는 시대에 출연자들은 자신이 어떻게 그려질지 모를 위험을 홀로 감수해야 한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제작진 마인드가 아직 20세기라서 잘못도 없는 출연자만 너무 큰 고통을 받는다”며 "방송 공개 전 내용과 캐릭터 등을 출연자에게 고지하고, 방송 후 불거지는 악플 피해 등도 제작진이 함께 책임진다는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변화의 기미도 있다. JTBC 연애 프로그램인 ‘연애남매’ 제작진은 출연자들이 악성루머와 악플에 시달리자 지난 7월 이례적으로 공식입장문을 냈다. 제작진은 "출연자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모든 행위에 단호하게 대응할 것”며 “법무팀과 협력해 악성 댓글과 비방 행위에 대한 모든 증거를 철저히 수집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JTBC 관계자는 "이후 악플이 거의 잦아들었다"고 말했다.



남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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