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 붐에 '러닝화 계급도' 유행… 급 나누기 문화 어디까지?

입력
2024.10.13 07:00
스포츠 브랜드 러닝화 등급 분류에
"자기 발에 맞는 제품이 우선" 지적
학벌·부동산·명품 줄 세우기에 이어
과자와 치킨 등 일상 곳곳에 '계급도'
"경쟁 심화에 따른 좌절의 도피 심리"


"이젠 하다 하다 신발에도 계급을 매기는 세상이 됐네요."
한 운동 커뮤니티에서 누리꾼 A씨

최근 온라인 운동 커뮤니티에서 화제를 모은 콘텐츠 '2024 러닝화 계급도'를 접한 A씨의 푸념이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러닝 붐'이 불자 성능이 뛰어난 러닝화에 대한 수요도 덩달아 급증했는데, 러너들의 관심이 '계급도'라는 콘텐츠 형태로 표출됐다.

A씨가 본 계급도에는 나이키와 아디다스, 뉴발란스 등 유명 스포츠 브랜드의 러닝화 제품 등급이 빼곡하게 매겨져 있다. 최상위의 '월드클래스'부터 그 아래로 '국가대표' '지역대표' '동네대표' 등 순으로 내려가는 식이다. 맨 끝엔 '입문용'으로 추천된 러닝화들이 나열돼 있다. 이 계급도는 한 러닝 마니아가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등급을 매긴 기준은 가격과 기능성 등으로 추정된다.

계급도 속 러닝화들은 뛰어난 성능과 함께 만만찮은 몸값을 자랑했다. '월드클래스'로 분류된 아디다스의 '아디제오 아디오스 프로 에보1' 제품은 탄소섬유 재질로 제작돼 가벼운 무게(138g)가 특징이다. 출시가가 59만9,000원에 달하는데도 품귀 현상에 웃돈을 주고 거래되는 실정이다. 등급이 낮다고 가격이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입문용'으로 소개된 호카의 '클리프톤9' 제품도 정가는 18만9,000원이었다.

'러닝화 계급도'의 실효성에 대한 운동인들의 평가는 갈렸다. 한 누리꾼은 "확실히 '월드클래스'급 신발을 신으면 기록이 확 단축되긴 한다"면서 "러닝 동호회 회원들은 다들 한 켤레씩 들고 있다"고 전했다. 반면 "자기 발에 맞는 신발을 찾는 게 최우선이다" "광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며 부정적인 반응도 있다.

학창 시절 최초의 계급도 '수능 배치표'

'러닝화 계급도'는 온라인에 유통된 각종 버전의 계급도 가운데 최신 사례일 뿐이다. 이미 부동산과 같은 고가의 자산부터 명품 브랜드 등 사치재에 이르기까지 '급 나누기' 풍조가 만연한 탓에 어떤 계급도의 탄생은 새로울 게 없다. 이 같은 세태는 경쟁과 비교 문화가 자리 잡은 한국 사회의 슬픈 자화상으로 평가된다.

최초의 계급도는 학창 시절부터 등장한다. 대학 입시를 겪으면서다. '수능 배치표'로 알려진 대학별 지원 가능 학과 기준표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계급도 중 하나다. 30년여 전 수능이 도입된 직후부터 '배치표'는 고교 학업 성취도를 평가하는 잣대로 기능해 왔다. 수능 배치표는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로 통하는 대학 서열을 일조하는 데 바탕이 되기도 했다.

각종 계급도의 효시로 꼽히는 '겨울 패딩 점퍼 계급도' 역시 학교 현장에서 기원한 것으로 전해진다. 10여 년 전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한 등산 브랜드 노스페이스 패딩 점퍼 계급도는 '등골 브레이커'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었다. 부모가 자녀에게 고가의 상위 등급 점퍼를 사주기 위해 등골이 빠진다는 의미다. '노스페이스 계급도'는 시간이 흘러 '명품 패딩 계급도'로 진화했다. 지금도 수백만 원에 달하는 몽클레르 등 '1티어' 명품 의류를 구매하기 위해 지갑을 여는 직장인들이 적잖다.

결혼시장에선 사람까지 서열화 대상

4, 5년 전 부동산 시장이 달아올랐을 땐 '부동산 급지표'가 이슈의 중심에 섰다. 수도권의 자치구를 집값에 맞춰 '황족' '왕족' '귀족' 등 순으로 나열한 것이다. 이 무렵부터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사회적 신분'이라는 인식이 강화됐다. 수입차와 명품 가방, 시계 브랜드의 계급도는 소비자의 구매 의사결정 과정에서 핵심 기준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고가의 재화에만 계급도가 있는 건 아니다. 스마트폰과 이어폰 등 전자기기 계급도도 존재하고, 전동공구, 자동차 타이어 등도 등급이 나뉘어 있다. 심지어 시중에 판매 중인 과자나 프랜차이즈 브랜드 치킨도 계급화됐다. 서열을 나누는 대상은 물건을 뛰어넘어 사람을 향하기도 한다. 결혼정보업체들은 남녀 구혼자의 직업과 재산을 토대로 등급을 매기고, 급에 맞는 사람들끼리 만남을 주선하는 편이다.


10명 중 4명 "브랜드 따라 지위 달라 보여"

각종 계급도가 범람하고, 상위 등급의 제품에 관심을 쏟는 이유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영향이 크다. 여론조사 업체 엠브레인이 지난해 7월 성인 남녀 1,0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어떤 브랜드를 착용했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지위가 달라 보인다'는 응답이 44.3%로 나타났다. '명품을 들고 다니면 왠지 자신감이 생길 것 같다"는 비율도 42.1%나 됐다.

이 같은 풍조는 '파노플리 효과'로 설명 가능하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자신의 저서 '소비의 사회(1970)'에서 소개한 개념으로, 특정 제품을 샀을 때 해당 제품의 구매층과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동일시하는 현상을 말한다. 즉 명품을 구매하면 자신이 사회 고위층이 된 듯한 착각을 받는다는 의미다. '파노플리(Panoplie)'란 불어로 '한 벌' '세트'라는 뜻으로, 본래 기사의 갑옷과 투구 한 세트를 가리키는 용어에서 유래했다.

사회 전반에서 파노플리 효과가 나타나는 배경에는 경쟁 지상주의가 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과거보다 실패하거나 좌절하는 사례가 많아지다 보니 일이나 학업에서 얻지 못한 성취를 다른 영역에서 보상받으려는 도피 심리가 강해지고 있다"며 "계급도가 세분화될수록 경쟁의 강도와 사회적 불안이 크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장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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