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 세포는 필멸한다" 자연 노화를 긍정한 老化학자

입력
2024.10.0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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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플릭 한계'를 밝힌 레너드 헤이플릭(Leonard Hayflick, 1928.5.20~ 2024.8.1)

20세기 초 오스트리아 생리학자 오이겐 슈타이나흐(Eugen Steinach, 1861~1944)는 고환을 이식받은 암컷 기니피그가 수컷처럼 다른 기니피그의 등에 올라타는 행태를 보이는 사실을 실험으로 확인했다. 고환이 남성의 성욕과 활력-회춘의 비밀이라는 19세기 이래의 오랜 가설을 ‘검증’했다고 믿은 그는, 고환의 두 기능 즉 정자와 성호르몬(테스토스테론) 생산 기능 중 전자를 억제하면 후자가 더욱 왕성해지리라는 가설을 세웠다. ‘슈타이나흐 수술’이 그렇게 시작됐고, 강렬한 체험 후기들이 잇따르면서 당대 수많은 부유층 지식인들이 경쟁적으로 '슈타이나흐드(Steinached)'됐다. 만년의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만 67세에 수술을 받은 예이츠는 젊은 여성과 공개 연애를 시작하며 “창조력이 되살아났다”고 선언했고, 더블린 언론은 그를 “회춘의 샘물을 마신 노인(gland old man)’이라 보도했다. 그는 약 6년 뒤 숨졌다.

세포배양 기술이 개발된 것도 20세기 초였다. 과학자들은 실험실에서 배양한 세포는 잘만 관리하면 무한 분열한다고 믿었고, 만일 잘못되면 연구자의 실수 즉 배지를 잘못 썼거나 오염된 탓이라 여겼다. 혈관봉합술과 장기이식 연구로 1912년 노벨상을 탄 프랑스 생리의학자 알렉시스 커렐(Alexis Carrel)이 닭 심장세포에서 추출한 세포를 40년 넘게 배양했다고 자랑(?)한 일도 있었다.
영생과 회춘을 향한 유구한 열망이 그렇게 전설의 골짜기에서 현대과학의 문턱을 넘었다.

1960년대 초 미국 펜실베이니아 ‘위스타르(Wistar) 연구소’의 젊은 연구원 레너드 헤이플릭(Leonard Hayflick)이 세포가 영생한다는 저 오랜 정설에 반기를 들었다. 암 유발 바이러스를 연구하기 위해 정상 태아 세포주(strain)를 배양하던 중 순탄하게 대사-분열하던 25개 세포들이 40~60회 분열한 뒤 복제 능력을 잃고 죽는 거였다. 반복 실험을 거쳐 자신의 실수가 아님을 확신하게 된 그는 62년 암세포를 제외한 모든 세포의 생명은 유한하다는 요지를 담은 대담한 논문을 발표했다.

생명-노화 연구의 토대가 된 이른바 ‘헤이플릭 한계(Hayflick Limit)’가 그렇게, 도그마적 권위와 억압의 껍질을 부수고 세상에 소개됐다. “모든 것이 변화-노화하는 우주의 시간 속에서 그 흐름을 멈추거나 거스를 수 있다는 건 모두 헛소리(nonsense)”라고 주장한 세포노화학의 실질적 창시자 레너드 헤이플릭이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96세.


헤이플릭은 9세 때 삼촌이 선물한 ‘길버트 화학 실험세트’를 갖고 놀면서 과학에 입문했다. 아버지의 치과 보철 가공업을 거들며 가사를 돌보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이 고체 나트륨을 구입할 수 있도록 보호자 동의서를 써주곤 했다. 나트륨은 물과 접촉하면 수산화나트륨과 수소로 분해되면서 폭발하는 위험물질이다. 나트륨과 노끈, 깡통을 이용해 만든 그의 로켓은 3,4층 높이까지 날았다고 한다.
그는 46년 펜실베이니아대(미생물학)에 입학하자마자 휴학, 18개월 간 육군으로 복무한 뒤 군인 장학금(GI Bill)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원도 몇몇 제약회사에 취직해 학비를 모은 뒤 진학했다. 돈이 없이 선택한 조기 입대였지만 그에겐 행운이었다. 안 그랬으면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해야 했을 것이다.

1950년대 DNA 이중 나선구조가 발견되면서 바이러스학도 황금기를 맞이했다. 56년 유펜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텍사스대 갤브스턴 메디컬 브랜치에서 2년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한 뒤 세균-바이러스 및 암 연구로 유명한 연구기관인 위스타르 연구소에 합류했다.
그 역시 처음엔 실험으로 드러난 ‘헤이플릭 한계’를 의심했지만 같은 결과가 거듭되자 동료 세포유전학자 폴 무어헤드(Paul Moohead,1924~2023)와 함께 실험을 반복했고, 그래도 못 미더워 당대 저명 세포 배양 전문가 3명에게 자신의 세포주를 주고 동일한 실험을 의뢰했다. 결과는 동일했다.
하지만 갓 서른을 넘긴 햇병아리 연구자의, 세포생물학의 기본 전제를 부정하는 주장에 학계는 냉담했다. 흑인 여성 헨리에타 렉스의 자궁경부암 조직에서 불멸의 '헬라 세포주’를 배양한 존스홉킨스 의대 세포생물학자 조지 게이(George O. Gey, 1899~1970)도 “레니(Leonard의 애칭), 이걸 발표하면 엄청난 소동에 휘말리게 될 거야”라며 말렸다. 정상세포를 40년 간 배양했다고 으스댔던, 2차대전 비시 프랑스의 우생학 과학자 알렉시스 커렐도 노벨상의 월계관을 쓰고 뉴욕 록펠러연구소를 좌지우지하고 있던 때였다.

권위의 ‘실험의학저널(JEM)’은 그의 논문을 반려했다. 1911년 닭의 암이 바이러스(Rous Sarcoma Virus)에 의해 발병한다는 사실을 발견해 66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탄 병리학자 페이턴 라우스(F. Peyton Rous)도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다. 라우스는 게재 거절 편지에 “조직 배양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포가 체외에서 적절한 환경만 제공하면 무한 복제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썼다. 자신의 발견이 세포 단위의 노화를 연구할 수 있는 단서가 되리라는 헤이플릭의 주장에는 “주목할 만한 무모함(notably rash)”이라고 일축했다.
지금도 세포생리학 분야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논문 중 하나라는 그의 논문은 61년 학술지 ‘실험세포연구(Experimental Cell Research)’에 실렸다.

실험으로 금세 반박될 수 있을 세포 불멸의 저 도그마는 그의 논문이 나오고도 질긴 생명력을 유지했다. 그의 옳음을 인정한 권위 있는 과학자의 첫 판정은, 후천성 면역 내성을 발견한 공로로 6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탄 호주 바이러스학자 맥팔레인 버넷(Macfarlane Burnet)이 74년 출간한 책 ‘내재적 돌연변이의 발생(Intrinsic Mutagenesis)’이었다. '헤이플릭 한계'란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도 ’노화의 유전학적 접근’이란 부제를 단 그 책이었다.
그 무렵까지 헤이플릭은 학계의 조롱과 유무형의 불이익을 감당해야 했고, 연구소에서도 만 10년간 준회원이었다. 그는 2011년 의과학저널 랜싯(Lancet) 인터뷰에서 “반백 년이 넘는 오랜 신념에 미사일을 쏘는 건 과학 분야에서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통념에 맞서는 걸 두려워하지 마라.
도그마에도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레너드 헤이플릭, 2018년 1월 'BioMedical Scientist 인터뷰에서.

헤이플릭의 성과와 수난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동식물에 기생하거나 땅속에 사는 가장 작은 형태의 세포체 세균을 통칭하는 마이코플라즈마(Mycoplasma)를 최초로 분리 배양한 것도, 그게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확인한 것도 62년의 헤이플릭이었다. 그가 마이코플라즈마 연구에 매달려 있던 무렵 당시 연구소장이 “엉뚱한 연구나 하라고 당신을 고용한 게 아니”라며 꾸짖었다고 한다. 세계 최초로 소아마비 생백신과 경구용 백신을 개발해 수많은 상과 훈장을 탄 바이러스- 면역학계의 거인 힐러리 코프로프스키(Hilary Koprowski, 1916~2013)였다. 마이코플라즈마의 한 종이 일반 폐렴과 다른 원발성비정형폐렴(일명 Walking Pneumonia)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밝힌 헤이플릭의 논문은 62년 미 국립과학원회보에 실렸고, 뉴욕타임스 1면 머리기사로도 소개됐다. 헤이플릭은 “코프로프스키도 내 연구실까지 찾아와 떨떠름하게 축하를 해줬다”고 말했다.

근년의 바이러스 백신 연구에는 병원체에 감염되지 않은 정상 인간의 세포가 주로 쓰인다. 헬라 세포주처럼, 불특정 다수의 실험 연구를 통해 배양하기 쉽고 미지의 변수들이 완벽하게 통제된 것으로 검증된 세포주는, 월드컵 경기의 공인구처럼 실험 연구의 편의뿐 아니라 신뢰도와도 관련되는 요소다. 소아마비와 홍역 볼거리 풍진 수두 대상포진 아데노바이러스 광견병 A형간염 등 역사상 가장 많은 감염 질병의 바이러스 백신 개발에 활용된 세포주인 ‘WI-38’도 그가 폴 무어헤드와 함께 62년 스웨덴의 한 병원으로부터 제공받은 여아 태아의 폐세포를 배양해 만든 거였다.
마침 그 무렵 소아마비 백신 제조에 널리 쓰이던 원숭이 신장 세포주가 ‘시미안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실이 드러났다. 그의 연구실에는 WI-38을 분양해 달라는 전 세계 학계와 백신 제약업계의 요청이 쇄도했다. 살아 있는 세포에 대한 특허권이 인정되지 않던 때였다. 그는 관례대로 배송 비용만 받고 무상으로 자신의 세포주를 전 세계에 배포했고, 세포 보관 및 배송 편의를 위해 미국립보건원(NIH)과 계약을 체결했다.
헤이플릭은 연구소측이 자기 몰래 영국의 저명 유전체학 연구센터인 웰컴 트러스트 생어 연구소와 WI-38 세포의 안정적 공급을 조건으로 거액의 로열티 계약을 체결, 정회원 연구비 등으로 활용해온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준회원이어서 거기서도 소외된 그는 세포주 실제 배송 비용과 청구 금액의 차액 등을 적립한 세포배양기금의 소유권에 대한 유권해석을 NIH에 요청한 뒤 68년 연구소에 사표를 내고 마침 제안받은 스탠퍼드대 교수직을 수락했다. 그는 수백 개의 WI-38 앰플 전량을 액체질소 보관용기에 담아 아내와 세 아이까지 탄 자신의 폰티악 세단 뒷좌석에 싣고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그는 기존과 동일한 방식 즉 NIH 관행에 따른 배송료만 받고 WI-38을 계속 배포했다.

NIH 행정 관료와 회계사는 그가 정부 재산을 절도해 영리사업을 벌인다며 76년 소송을 걸고,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대학 연구실에 들이닥쳐 WI-38 앰플 전량을 압수했다. 스탠퍼드대 측도 자체 진상조사를 진행하자 그는 그 해 사직서를 냈다. 소송은 6년 넘게 이어졌다. 그 사이 학계와 업계 의견을 수렴한 연방 정부는 80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의 행정명령과 새 법(Bayh-Dole Act)으로, 정부 지원을 받은 프로젝트의 연구자도 연구 성과를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살아 있는 세포에 대한 특허권도 인정했다.
소송은 82년 1월 법무부 중재 하에 합의로 마무리됐지만 사실상 헤이플릭의 일방적 승리였다. 그는 당시까지 적립된 세포배양기금 약 9만 달러와 WI-38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기금은 전액 소송 비용으로 쓰였다. 실업자가된 그는 82년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오클랜드의 한 아동병원에서 연구비를 지원받기 전까지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 관련 기관에 가서 줄을 서야 했다.

합의 직후인 82년 1월 15일 미국 과학진흥협회 저널 '사이언스'에 헤이플릭을 응원하는 저명 과학자 85명의 서명 메시지가 실렸다. “발군의 업적을 쌓아온 한 과학자의 경력이 거의 파괴되다시피 한 사태에 개탄"하며 “헤이플릭 박사의 용기와 고독, 상처와 직업적 시련은 미래를 위한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유사한 일이 빚어질 경우 (과학에 무지한 감사 공무원이나 관리자가 아니라) 독립적인 과학자들의 동료 검토 시스템을 통해 대응책을 모색하라”는 내용이었다.
그의 소송과 승리는 80년대 이후 미국을 포함 전 세계 수많은 대학과 공공 연구소 기반 생명공학 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됐고, 헤이플릭은 그 소송을 자신의 과학적 업적 중 하나라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플로리다대(82~88)와 캘리포니아대 교수- 명예교수(88~)로 노인학과 해부학, 면역학 등을 강의하며 275편의 논문과 다수의 책을 썼고, 미국 노인학회 회장과 NIH 산하 미국노화연구소 창립 이사, 13년 간 국제 학술저널 '실험 노인학' 편집장 등을 역임했다.
59년 그가 세포 연구용으로 개량한 도립현미경(inverted microscope)은 현재 널리 사용되는 도립현미경의 원형으로서 2009년 스미소니언박물관에 소장됐고, 65년에는 역시 세계 최초로 분말형 배지를 개발했다. 분말형 배지는 액체에 비해 관리와 보관이 용이하고 값도 저렴해 지금도 널리 쓰이지만, 그는 어느 것에도 특허권을 신청하지 않았다. 2018년 '바이오메디컬사이언티스트' 인터뷰에서 그는 "WI-38에 특허를 냈다면 그걸 팔아 번 돈으로만 런던을 살 수 있을 만큼 부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근년의 노화-수명 연장 연구 열기는 과하다 싶을 만큼 뜨거워 AMPK, 오토파지, 엠토르 등 어려운 용어들이 대중 매체에도 심심찮게 오르내린다. 하지만 그가 ‘헤이플릭 한계’를 설득하던 60, 70년대 사정은 사뭇 달랐다. “생물노화학(biogerontology)이나 노화 연구를 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건 직업적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고 할 만큼 인기도 없고 전망도 불투명한 분야였다.
헤이플릭은 그 시절부터 줄곧 생명 수명이 아닌 건강 수명(healthspan)에 초점을 둔 연구, 치매 등 개별 노화 ‘질병’이 아니라 세포 차원의 근본적인 노화 연구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100년 전에 비해 수명이 2배 늘어났다고 앞으로도 무한정 늘어나리라 기대하는 것은 터무니없고 설사 그게 가능하더라도, 빈부 차이가 수명까지 좌우하는 현실에 대한 윤리적 평가나 국민연금 등 사회보험 대책 등은 덮어두더라도, 결코 개인과 사회에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1년 가디언 인터뷰에서 그는 “인간의 노화를 조작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끔찍한 비관론자다. 나는 그게 가능해져도 그렇게 살아남고 싶지 않다. 아돌프 히틀러나 사담 후세인에게 50년을 더 살게 해주고 싶지도 않다. 그런 이들이 자연사할 때마다 사람들은 노화 현상에 대해 어느 신이든 그 신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노화 연구가 주류가 된 뒤로도 비주류였다. “나는 친구를 많이 사귀지 못했다. 하지만 친구보다 진실에 더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인구학-수학적 분석을 근거로 학계가 추정하는 인간 기대수명은 아직까진 최대 120~125세 정도다. 헤이플릭보다 20여일 늦게 향년 117세로 세상을 떠난 세계 최고령 여성 마리아 브레니어스 모레라(Maria Branyas Morera)도 만년 인터뷰에서 “남은 삶에서 무엇을 기대하느냐”는 질문에 “죽음”이라고 담담하게 답했다고 한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