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이 국정감사 기간에 얻은 자료를 비실명 처리한 후 시민단체에 제공했더라도, 가명 처리된 사업 주체가 정신적인 피해를 봤다면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국회의원이 행한 고도의 공적 활동(형사 면책 특권)이라도, 그에 따른 개인 손해를 배상해야 할 민사적 책임까지 모두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취지다.
1일 법조계 등에 따르면, 서울서부지법 민사36단독 주한길 판사는 개 농장 주인들이 이정미 전 정의당 의원과 동물보호단체 카라 등에 대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1인당 10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선고했다. 판결 시점은 올해 3월이다.
앞서 이 전 의원은 2017년 국정감사 당시 환경부로부터 ‘전국 개 사육시설 현황자료’를 엑셀 파일 형태로 제공받았고, 이를 비실명화해서 카라에 제공했다. 당시 이정미 의원실은 농가 이름 첫 글자만 살린 뒤 개 농장 이름을 '고OOOO'와 같이 처리해 카라 측에 넘겼다. 카라는 의원실에서 받은 자료를 바탕으로 개 농장 실명을 유추한 다음 △사업장명 △주소지 △규모 △관련 법령에 따른 신고사항 이행 여부 등을 지도에 표시해 2019년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렸다.
농장주들은 이 전 의원이 개인정보를 제3자(카라)에게 제공해 자신들에게 큰 손해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육견협회 관계자는 "당시 하루에 수백 건씩 항의 전화가 쏟아졌고, 이로 인한 농장주들의 재산·정신적 피해가 극심했다"고 호소했다. 반면 이 전 의원 측은 공개된 정보는 사업주 개인정보가 아니라 사업장 정보이고, 사업장 첫 글자만 표시해 개인정보 보호법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맞섰다.
법원은 '가명 정보 역시 개인정보'라며 농장주들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일부 혹은 전부를 삭제하거나 대체하는 식으로 특정 개인을 식별할 수 없게 처리된 정보도 개인정보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이어 "이런 개인정보를 (이 전 의원이) 시민단체에 제공하고, 이를 게시할 때 원고들로부터 별도 동의를 받지 않은 점은 위법하다"며 "정보 주체들에게 정신적 손해를 입힐 수 있다"고 봤다.
소송에서 패소한 이 전 의원과 카라 측은 "국회의원이 받은 자료를 공익적인 목적으로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며 항소장을 제출한 상태다. 구태언 법무법인 린 변호사는 "사업장 명을 사업주의 '개인' 정보라고 본 것인데, 이것부터 지나친 해석"이라며 "모든 데이터는 검색 등을 통해 개인과 이어질 수 있는데, 가명 처리한 정보에 대한 과도한 규제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