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확전 위기가 고조돼 있던 중동에 '결정적 시간'이 도래했다. 이스라엘이 레바논 친(親)이란 무장 정파 헤즈볼라의 지도자인 하산 나스랄라를 살해한 데 이어, '헤즈볼라 궤멸'을 이루겠다는 태세로 레바논 남부 침공을 위한 지상전 준비까지 본격화했다. 기세를 이어 이스라엘에서 1,700㎞ 떨어진 예멘 반군 후티의 근거지까지 폭격했다. 이란과 친이란 세력은 총궐기 및 보복을 공언했다. 갈등 완화를 위한 '외교적 노력'이 발휘될 틈조차 보이지 않는다. 중동 정세가 '확전의 덫'에 빠져드는 모습이다.
29일(현지시간) 이스라엘 타임스오브이스라엘(TOI) 등에 따르면, 나스랄라는 지난 27일 오후 6시 20분쯤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남부 다히예에 있는 헤즈볼라 지휘 본부를 겨냥한 이스라엘방위군(IDF)의 표적 공습으로 사망했다. 나스랄라는 1992년부터 32년간 조직을 이끈 '헤즈볼라의 상징'이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스라엘이 지하 약 18m에 위치한 벙커에서 회의 중이던 나스랄라를 제거하기 위해 80톤가량의 폭탄을 퍼부었다"고 전했다.
사망 사실은 폭격 다음 날 확인됐다. 헤즈볼라는 28일 "나스랄라가 순교했다"며 "이스라엘에 대한 성전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같은 날 '새로운 질서(New Order)'라는 이름의 나스랄라 제거 작전을 자신이 명령했다며 "이스라엘 파괴 계획의 설계자였던 나스랄라를 살해한 것은 역사적 전환점"이라고 말했다. IDF는 이스라엘공군(IAF) 참모총장인 토머 바르와 나스랄라 공습 작전을 수행한 69비행단 사령관의 작전 당시 대화도 공개했다. "테러 조직 목을 잘랐기를 바란다" "잘했다" 등의 발언이 있었다. 알리 카라키 남부전선사령관과 이란 혁명수비대 장성 등을 포함해 최소 6명이 이때 숨졌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습은 계속됐다. 28일 헤즈볼라 무기고 폭격 이후 레바논 보건부는 "최소 33명이 사망하고, 195명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29일에도 IDF의 공습으로 최소 4명이 숨졌다고 미국 CNN방송이 전했다. TOI는 "헤즈볼라 예방보안부대 사령관이자 중앙위원회 고위 인사인 나빌 카우크 역시 28일 베이루트 폭격 때 사망했다"고 29일 보도했다. 카우크는 나스랄라의 후계자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인물이었다.
'제한적 지상전' 돌입 임박 소식도 잇따라 전해졌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IDF가 레바논 접경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켰다"고 28일 보도했고, TOI는 "IDF가 이미 레바논에서 소규모 (지상) 군사 작전에 돌입했을 수 있다"고 29일 전했다.
이란의 지원을 받는 또다른 '저항의 축'인 예멘으로 전선도 넓혔다. IDF는 29일 전투기와 공중급유기·정찰기를 포함한 수십대의 항공기를 동원해 후티 반군의 거점인 예멘 항구도시 라스이사와 호데이다를 공습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알아라비야 방송은 호데이다의 발전소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그간 이스라엘과의 직접적 충돌을 꺼려 온 이란은 결국 총공세를 공언했다.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는 28일 '저항의 축'(미국·이스라엘에 적대적인 친이란 세력)을 향해 "헤즈볼라 지원은 모든 무슬림의 의무"라며 궐기를 촉구했다. 실제 이후 헤즈볼라, 예멘 후티 반군 등의 대(對)이스라엘 공격도 이뤄졌다. 이란 관리는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레바논 파병도 가능하다"고 언급했다. 다만 미국 뉴욕타임스는 이란 내부에서 '이스라엘에 고강도 대응을 해야 한다'는 강경파와, '네타냐후가 확전을 위해 만든 함정에 빠져선 안 된다'는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 중심의 온건파가 대립하고 있다고 짚었다.
이스라엘은 '보복 시 맞보복'을 예고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하메네이를 겨냥해 "우리는 우리를 공격하는 자를 공격할 것이다. 중동에는 이스라엘의 긴 팔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고 경고했다. 이란 등의 보복을 고려해 경계 태세를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한편, 미국에는 '대(對)이란 억제 조치를 취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나스랄라 살해를 "정의의 실현"으로 평가하면서도 확전 자제를 촉구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외교적 수단을 통해 가자지구와 레바논에서 진행 중인 갈등을 완화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과 프랑스가 제안한 '이스라엘·헤즈볼라 3주 휴전안'은 사실상 무산된 듯하나, WSJ는 "이스라엘이 유리한 고지에 상황을 헤즈볼라에 대한 휴전 압박 기회로 활용하고자 (미국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