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 죽음, 공포가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를 휩쓸었다.”
이스라엘이 친(親)이란 무장 정파 헤즈볼라의 수장 하산 나스랄라 제거 작전을 수행한 27일 밤(현지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대규모 공습을 받은 현장 상황을 이같이 묘사했다. 베이루트 남부 다히예의 하렛흐레이크 지구 상공에 이스라엘군 전투기 굉음이 퍼지던 순간,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고층 아파트들은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30㎞ 이상 떨어진 지역에서도 창문이 흔들릴 정도로 위력이 컸고, 폭발음은 베이루트 어디에서도 들릴 정도였다.
폭격을 눈앞에서 본 레바논 최대 공립 병원의 병원장인 지하드 사데는 28일 “건물들이 그냥 무너졌다. 부상자는 없었고 시신들만 있었다”고 FT에 말했다. ‘학살로 가득한 잠 못 이루는 밤의 시작’이었다는 게 그의 전언이다.
하렛흐레이크는 레바논의 최대 인구 밀집 지역 중 하나다. 헤즈볼라가 일대를 통제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스라엘군이 지하 약 18m쯤에 위치한 헤즈볼라 지휘본부에서 회의 중이던 나스랄라를 제거하기 위해 80톤 이상의 폭탄을 퍼부었다고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폭격 이후 7~9층짜리 아파트 3채는 완전히 붕괴됐고, 1채가 크게 부서지기도 했다. 주말 저녁 사전 경고도 없이 아파트에 초대형 폭탄이 떨어진 만큼, 잔해 속에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묻혀 있는지는 현재로선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스라엘군이 헤즈볼라 지하 본부 초토화에 사용한 폭탄은 이른바 ‘벙커버스터’로 불리는 2,000파운드(907㎏)급 BLU-109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약 2m 두께의 콘크리트 벽도 뚫을 수 있는 위력을 자랑한다. 목표물 내부로 파고든 뒤 폭발하는 방식으로, 지하 벙커 등 파괴에 주로 쓰인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이스라엘군이 공개한 전투기 출격 영상을 분석해 “항공기 8대에 최소 15개의 BLU-109 폭탄이 장착돼 있음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벙커버스터는 미국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간 전쟁 초기, 은밀히 100개가량 지원한 폭탄이다. 민간인 희생을 키우는 조치라는 비난이 거세지자,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지난 5월 BLU-109 폭탄의 이스라엘 운송을 전격 중단했다. 이 때문인지 이스라엘은 벙커버스터 사용 여부를 공식 확인하지 않았다. 하체림 공군기지 사령관 아미차이 레빈 준장은 “전투기가 약 100개의 폭탄을 2초 간격으로 정확하게 투하했다”고만 설명했다.
이스라엘군은 나스랄라 제거 이후에도 이튿날 오전까지 11차례에 걸쳐 베이루트 남부 일대에 맹폭을 이어갔다. 엑스(X·옛 트위터)에 베이루트 남부 교외에 위치한 ‘부르즈 알바라즈네 팔레스타인 난민촌’ 주변을 겨냥한 추가 폭격을 예고하자, 일대 주민들이 공포에 떨기도 했다.
지진을 방불케 하는 진동과 폭음, 머리 위를 쉴 새 없이 오가는 무인기(드론)의 소음에 놀란 베이루트 남부 지역 주민들은 앞다퉈 피란길에 올랐다. 미국 CNN방송은 최소 수백 가구가 이날 베이루트 주변 해안과 시내 광장 등에서 밤을 보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