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정치학자 제임스 스콧은 1950년대 말 로터리 펠로십으로 1년간 미얀마(당시 버마) 현장 연구를 진행하면서 동남아시아 정치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권위주의 정부에 저항한 현지 학생운동에 간접적으로 개입했고, 관련 정보로 CIA에 협력함으로써 그 덕에 프랑스 파리 유학 기회를 얻기도 했다. 어쩌면 그의 연구 배경에는, 전후 민족주의-냉전 이데올로기에 대한 환멸뿐 아니라 권력 언저리 인간들에 대한 환멸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 전형적인 사태 중 하나가 그의 레이더 권역 안에 있었을 1965년 인도네시아 대학살이었다. 자칭 ‘9월 30일 운동(30 September Movement)’이라 명명한 수하르토 등 우파 정치군인들의 수카르노 정권에 대한 사실상의 쿠데타와 좌파에 대한 대규모 집단 학살 사태였다.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 수카르노는 45년 독립-집권과 동시에 소위 ‘건국 5원칙(Pancasila)’을 천명했다. 민족적 단합과 다종교 화합, 대의제 민주주의, 정의와 인본주의, 사회정의였다. 그는 군부와 무슬림 단체, 공산당의 불안정한 연합 즉 ‘나사콤(Nasakom)’을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상정했다.
하지만 수카르노 정권은 55년 반둥회의 등 비동맹국회의를 이끌며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등 좌파와 가까워졌고 공산당-혁명주의를 공개 칭송하며 중국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 결과가 미국-영국을 뒷배로 둔 수하르토 군부의 65년 10월 학살이었다. 쿠데타 권력은 66년 초까지 공산당원과 좌파 활동가 및 동조자 등 최소 50만 명, 최대 200만 명을 학살했다. 30년대 스탈린의 숙청, 2차대전 나치 홀로코스트, 50년대 마오쩌둥의 인민 학살에 버금가는 20세기 최악의 집단 학살이었다.
저 피바다 위에 67년 출범한 수하르토 정권은 IMF 사태 직후인 98년 몰락할 때까지 이어졌고, 65년 학살의 진실은 2014년 비군인 출신 정치인 조코 위도도가 집권하고도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