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이 밸류업 발목" 외신 지적... 상법 개정 필요한 이유다

입력
2024.09.25 00:10
27면

국내 증시의 저평가 해소를 위해 정부가 밸류업(가치제고)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지만 재벌 기업 탓에 의미 있는 수준의 개혁이 어려울 거라는 외신 지적이 나왔다. 제 잇속만 챙기는 재벌 대주주의 막강한 힘이 주가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거래소가 어제 ‘코리아 밸류업 지수’를 개발해 발표했는데, 힘을 받으려면 당국이 이런 지적을 충분히 새겨야 할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의 재키 웡 칼럼니스트는 ‘한국은 일본 시장개혁을 모방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제목의 칼럼에서 “한국의 밸류업 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재벌의 힘이 주가 상승을 제한할 것”이라고 직격했다. 재벌들은 상호출자 등 복잡한 기업구조를 이용해 지배력을 유지해왔으며 이들의 이해관계는 일반적으로 소액주주의 이해관계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은 최근 국내에서 거론되는 상법 개정 요구와 맞닿아 있다. 금융 당국과 야당에서는 상법상 이사의 충실 의무를 주주의 이익 보호로 확대하자는 주장을 해왔다. 쪼개기 상장처럼 전체 주주가 아닌 대주주의 이익만 추구하는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는 취지다. 재계는 회사 이익과 주주 이익은 다르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극렬 반대하지만, 외신 진단처럼 재벌 특수성이 깊이 뿌리내린 국내에선 두 이익이 상충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겉핥기만 하다 보니 밸류업 실적은 좀체 진척이 없다. 본격 시행 4개월여가 지났지만 자발적으로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내놓은 ‘밸류업 공시 기업’은 전체의 0.5%인 13곳이 고작이다. HSBC는 저조한 밸류업 참여 실적을 이유로 이날 한국 주식시장 투자 의견을 ‘비중 확대’에서 ‘축소’로 하향 조정하기까지 했다.

거래소는 100개 종목을 편입한 밸류업 지수가 기업들의 기업가치 제고 동기를 부여할 모멘텀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 등 시총 상위 대기업이 대부분 편입되는 등 기존 대표지수와 차별성은 미미해 보인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지만, 좀 더 과감한 전환을 위한 보완이 필요할 것이다. 정부와 국회의 역할도 중요하다. 상법 개정을 비롯해 대주주 전횡을 막는 긴 안목의 대책이 병행되지 않으면 밸류업이 허울 좋은 구호에 그칠 수 있음을 명심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