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대북정책의 핵심에 있던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지난 19일 광주에서 열린 9·19 평양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에서 던진 말이 일주일 넘게 정치권을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까지 가세해 "반헌법적 발상"이라고 비판하면서 판이 커지고 있습니다. 여권에선 '적대적 두 국가론'을 내세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주장과 연결해 "북한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하면서 '충북(忠北)' 본능을 드러냈다는 얘기까지 나옵니다.
내년이면 분단 80년째 접어드는 한국 사회에서 통일은 진영을 떠나 당연히 이뤄야 할 과업으로 다뤄져 왔습니다. 이 때문에 "통일을 하지 말자"는 제안은 다분히 도발적입니다. 더구나 발언의 당사자가 통일을 누구보다 강조해 온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의장 출신 임 전 실장이라는 점에서 파장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분위기입니다. 뻔히 예상되는 논란을 알고도 임 전 실장은 왜 이런 제안을 했을까요.
우선, 발언의 맥락을 뜯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단순히 북한이 설득이 안 돼서 '포기하자'는 주장이라면 윤 대통령의 지적대로 '통일을 지향'하도록 규정한 헌법 정신에 맞지 않습니다. 임 전 실장은 발언 당시 "현시점에서 통일 논의는 비현실적"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여기에는 북한의 비협조도 있지만 갈수록 오랜 분단에서 오는 이질감으로 통일에 거부감이 커지는 우리 사회 내부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는 판단이 깔려 있습니다. 임 전 실장은 "남북 모두에게 거부감이 큰 통일을 유보함으로써 평화에 대한 합의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해석됩니다. 즉, 통일을 포기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선평화 후통일'을 말한 것이 발언 취지에 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 위원장을 향해서도 "적대적인 두 개의 국가 관계는 있을 수 없다"고 분명하게 경고했습니다. 임 전 실장은 26일 CBS라디오에서도 "적어도 한 30년은 통일 논의는 봉인하자"며 본인의 주장을 '평화공존론'으로 정의했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강조하고픈 '평화'보다 후순위인 '통일'을, 그것도 논란이 뻔히 예상되는 방식으로 언급한 데에는 분명 '정치인 임종석'의 의도가 깔려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 전 실장은 어떤 정치적 효과를 기대했을까요. 이를 둘러싼 정치권의 해석은 분분합니다.
먼저, 야권을 중심으로 그의 주변에서는 '임종석의 진정성'을 거론합니다. 임 전 실장과 오랜 기간 알고 지내온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북한이 적대적으로 나오는 상황에서 한 차원 더 높은 고민을 던져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통일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목적이라는 취지입니다. 친이재명계 한 의원도 "통일 운동을 해왔던 사람으로서 답답함을 토로한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라고 봤습니다.
실제 임 전 실장 제안은 학계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고민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상대방인 북한에서 의지가 없는 만큼 낭만적인 통일론을 버리고, 각각의 체제를 인정하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인 접근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번 연설도 임 전 실장을 돕는 전문가 그룹의 조언을 바탕으로 나왔습니다. 임 전 실장 측 한 인사는 "평소 '언젠가는 얘기해야지' 생각했던 고민이었지만, 흡수통일을 내건 윤석열 대통령의 독트린이 트리거가 됐다"고 설명합니다.
논란을 키웠던 건 임종석이라는 개인 캐릭터에서 오는 이질감이 더 크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임 전 실장에게 통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고유한 정체성이 됐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전국적인 인사가 된 것도 전대협 의장 시절 임수경 전 의원의 방북을 기획했다가 수배되면서부터였습니다. 또 2018년 남북정상회담에서는 김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의 카운터파트로 활약하면서, 이후 유력한 통일부 장관 후보로 거론됐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상황에 대한 고려도 없진 않았을 것입니다. 지난 4월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는 데 실패한 이후 침잠하고 있던 그에게 이번은 존재감을 드러낼 '절호의 기회'였다는 관측입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은 상황에서 명분도 충분했던 데다, 이재명 대표의 사법리스크가 고조되며 대항마로 '3김(김부겸 전 국무총리, 김경수 전 경남지사, 김동연 경기지사)'이 거론되는 시점과도 공교롭게도 맞아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대표는 오는 11월 15일 선거법 위반 혐의 1심 선고를 앞두고 있는데, 검찰은 의원직 상실형인 2년을 구형한 상황입니다.
차기 대선주자로 꼽히는 임 전 실장 입장에서는 존재감을 드러내야 차기를 도모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문재인 정부 출신 한 민주당 의원은 "(임 전 실장이) 공천 탈락 이후 존재감이 사라져 조급해진 듯하다"며 "자기 정치하려고 지른 것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실제 임 전 실장은 반헌법적 발언이라고 자신을 공격한 윤 대통령을 향해 "윤 대통령은 위기로 치닫고 있는 한반도 상황에 도대체 어떤 해결책을 갖고 있느냐"며 "윤 대통령이야말로 지금 정확하게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에 동조하고 있다"고 반박하면서 전선을 확대했습니다. 임 전 실장이 도발적 발언을 하지 않았다면, 윤 대통령과 맞붙는 장이 마련됐을까요.
이 대표 중심의 민주당에서도 마뜩잖은 분위기가 감지됩니다. 이 대표부터 지난 25일 비공개 최고위원회의에서 "임 전 실장의 메시지는 당론이 아니다"라며 "당 강령과 헌법 정신에도 맞지 않다"고 거리를 뒀습니다. 민주당은 강령에 '평화적 통일을 지향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강령에 위배된다고 해서 징계를 검토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같은 586 운동권 출신인 김민석 최고위원도 지난 22일 페이스북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설득할지언정 동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임 전 실장을 저격했습니다.
야권 내부에서는 이번 발언으로 임 전 실장이 얻는 정치적 이득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과거 이념에 집착하는 586의 한계를 탈피하려는 시도"라고 언급한 한 민주당 관계자는 "새로운 철학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차원에서 충분히 던질 수 있는 담론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고 말했습니다. 야권의 유력 대선주자인 이 대표의 정체성에 뚜렷하지 않은 '통일'이란 개념을 임종석의 것으로 각인시키는 계기는 충분히 마련했다는 얘기입니다.
반면 임 전 실장과 가까운 한 야권 인사는 "레드 컴플렉스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거꾸로 갇히는 일이 벌어졌다"고 우려했습니다. 향후 2, 3라운드를 어떻게 전개할지 지켜봐야겠지만, 그가 말한 의도는 묻힌 채 일반 대중에게 '임종석=종북' 이미지만 덧씌워졌을 수 있다는 평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