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대북정책을 주도한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이른바 '통일 유예' '남북 두 국가론' 발언의 파장이 정치권 전체로 확산하고 있다. 대통령실과 여당은 당장 "김정은 지령을 받은 반헌법적 통일 포기 발상"이라며 색깔론을 꺼내 들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임종석의 사견"이라며 거리를 두는 한편으로 "불필요한 논란 자초"라는 등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정치권 반응은 임 전 실장 스스로 "도발적 발제"라고 평할 만큼 '핫'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선(先) 평화-후(後) 통일' 담론 자체가 새로울 건 없는 주장이지만 "통일을 꼭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내려놓자"는 말 자체에 논란의 여지는 다분했다는 평가다. 여기에 △두 개 국가론 △헌법 3조 개정까지 더해지면서, 국민적 공감대를 뛰어넘어 "너무 나갔다"는 지적이다.
당장 '친정'인 민주당 내에서도 '경솔했다'는 얘기가 터져 나왔다. 노무현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동영 민주당 의원이 20일 9·19 기념식 행사장에서 "임 전 실장이 어제 사고를 친 것 같다"고 털어놓을 정도다. 문재인 정부에서 국정원장을 지낸 박지원 민주당 의원 역시 "통일이 아니라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이라면서도 "학자는 주장 가능하나 현역 정치인의 발언으론 성급하다고 생각한다"고 꼬집었다. 한 초선 의원은 "통일을 위해 노력해온 진보정부가 싸그리 반헌법 세력이란 비판만 뒤집어쓰게 됐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물론 이재명 대표가 이날 최고위원회의 공개발언에서 임종석의 'ㅇ' 자도 언급하지 않는 등 당내 지도부는 말을 아끼는 모습이 역력하다.
반면 국민의힘은 "민주당 정권이 그동안 얼마나 가짜 통일·평화 쇼에 몰두해 왔는지 보여주는 자기 고백"이라며 공세를 이어갔다. 추경호 원내대표는 이날 원내대책회의 후 "(북한이) 통일이 필요하다고 할 때는 통일론을 주장하고, 통일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면 보조를 맞추는 정말 기이한 현상"이라고 꼬집었다.
학계에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통일을 빼고 평화만 하자는 건, 영구 분단으로 가자는 것이냐"(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비판 속에 현실론적 통일론을 검토해봐야 할 때라는 지적도 나온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통일을 지향하되 우선 평화를 만들자는 현실론에 더 힘을 실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외교부 차관을 지낸 최종건 연세대 교수는 "평화를 흔드는 상황을 바로잡자는 차원에서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한 것 아니겠느냐"고 옹호했다. 민주연구원 부원장을 맡고 있는 친명계 이연희 민주당 의원도 "새 정부가 직면할 주요 과제는 신냉전 질서하에서 남북관계를 슬기롭게 풀어나가는 것으로 지금부터 치열하게 논쟁해야 한다"고 임 전 실장의 주장에 공감을 표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이날 기념연설에서 "지금 한반도는 한국전쟁 이후 가장 위험한 상황"이라며 적극적인 남북 대화를 촉구했다. 특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한 데 대해 "평화와 통일이라는 겨레의 염원에 역행하는 반민족적 처사"라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김 위원장의 두 국가론에 임 전 실장이 동조하고 있다는 여권의 비판을 수습한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임 전 실장은 자신의 발언에 대한 논란에 "어떤 토론이든 건강한 토론이 많이 일어날수록 좋다"며 "제가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말을 아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