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차례 읊조린 수상한 기도문... 이집트 베테랑 조종사의 '자살 비행'이었나

입력
2024.09.20 09:00
15면
<87> 1999년 이집트항공 990편 추락 사건
미국 출발 이륙 30분 만에 부조종사 교대
"신께 맡긴다" 기도... 미 "고의 추락" 결론
이집트 "기체 결함" 반박... 공방만 과열돼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1999년 10월의 마지막 날, 시간은 새벽 2시를 향했다. 미국 뉴욕에서 이륙한 ‘이집트항공 990편(기종 보잉 767-366ER)’ 조종실 한쪽에서 한 남성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렀다. “신께 맡깁니다. 신께 맡깁니다. 신께 맡깁니다….” 남성은 11차례에 걸쳐 기도문을 반복했다. 승무원을 포함해 217명을 태운 거대한 항공기가 급강하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대서양 해역에 곤두박질친 항공기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생존자 '0명'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비행이었다. 애초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출발한 항공기는 뉴욕의 존 F 케네디(JFK) 국제공항을 경유했다. 뉴욕에서 최종 목적지인 이집트 카이로 국제공항까지 예정된 비행 시간은 약 10시간. 이집트 여행을 앞둔 단체 관광객 등 미국인 100여 명을 포함해 7개국 출신 승객 203명(기장 등 승무원 14명)이 탑승한 상태였다. 이집트군 장교 33명도 탑승자 명단에 포함됐다. 1999년 10월 31일 오전 1시 20분, 이집트항공 990편이 활주로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항공기는 3만3,000피트(약 10㎞) 상공을 날았다. 무서운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한 건 이륙한 지 불과 20~30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3만1,500피트, 2만5,400피트, 1만8,300피트. 항공기가 1만8,300피트(약 5.6㎞) 상공까지 급전직하하는 데엔 불과 36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레이더 신호가 잡힌 건 오전 1시 50분쯤이었다. 미국 동부 매사추세츠주(州) 난터켓섬 남쪽에서 60마일(약 100㎞) 떨어진 대서양 속으로 항공기는 모습을 감췄다.

미 해안경비대는 즉시 실종자 수색에 나섰다. JFK 국제공항 인근 한 호텔에 실종자 가족들이 머물 위기 센터도 차려졌다. 하지만 생존자 구출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승객과 승무원 217명 전원 사망이었다.

이집트 정부는 미국에 기체 회수 및 공식 조사 주도권을 넘겼다. 대신 미국에 이집트 조사관들을 파견했다. 미 국가교통안전위원회(NTSB)는 공식 조사에 착수했다. 미 연방수사국(FBI)도 수사 요원 600여 명을 투입해 테러 가능성을 조사했다. 그러나 비행 전후에 테러 공격이 이뤄졌다고 볼 만한 정황이나 단서는 포착되지 않았다. 비행 내내 기상 조건도 양호했다. 기체 결함이 사전 보고된 적도 없었다.


부조종사의 기도

추락 당시 조종간을 잡았던 부조종사 가밀 알 바토우티(당시 59세)가 진상 규명의 핵심 인물로 부상한 건 사고 원인 조사가 개시된 지 약 2주쯤 후였다. 바토우티의 ‘자살 비행’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이집트 공군 장교 출신으로 군에서 조종사 교관으로 경력을 쌓았던 그는 1987년 비교적 늦은 나이인 40대 후반쯤 이집트항공에 입사했다. 이 항공사에서만 1만2,500시간에 달하는 비행 기록을 보유한 베테랑 조종사였고, 이듬해 3월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바토우티는 사고 당시 조종실에 없어야 했다. 장거리 비행의 경우 조종사들이 교대로 비행을 맡는데, 바토우티는 휴식을 취하다 후반부 비행을 맡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그는 뉴욕에서 비행기가 이륙한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조종실을 찾았고, 그때 부조종석에 앉아있던 부기장 아델 안와르(당시 36세)에게 교대를 요구했다. 미국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바토우티는 “상급자 명령”이라며 교대를 거부하는 안와르를 압박했고, 결국 부조종석에 앉았다.

기장 아메드 엘 하바시(57)는 이런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바토우티가 부조종석에 앉은 지 몇 분 정도가 지났을 때 하바시 기장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조종실을 나섰다. 바로 그 순간, 바토우티의 읊조림이 시작됐다. “신께 맡긴다.” 11차례에 걸친 기도문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하바시 기장이 조종실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야?” 다급한 기장의 목소리가 조종실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이미 항공기는 자동조종장치가 풀린 채 빠르게 하강하고 있었다.


미국, 고의 추락 결론

NTSB는 조종실 음성기록장치(CVR)에 녹음된 이 같은 상황을 토대로 바토우티가 고의로 비행기를 추락시켰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2002년 3월 NTSB는 2년여간의 조사 끝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이집트항공 990편이 “항공기 조종 장치 조작”으로 인해 추락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살 비행’이라는 표현은 없었지만 사실상 조종사의 의도된 추락이었다는 게 NTSB의 설명이었다.

당시 일부 미국 언론도 바토우티의 가족 등 주변인들 인터뷰를 토대로 동일한 추론을 내놨다. 기장으로 승진하지 못한 채 정년퇴직을 앞둔 점, 자녀 5명 중 막내 딸(당시 10세)이 면역체계 질환인 루푸스를 앓아 평소에도 근심이 컸다는 점 등이 이유로 거론됐다.

특히 이집트항공에서 함께 일했던 조종사 함디 하나피 타하의 증언도 힘을 보탰다. 타하는 바토우티가 비행 전 머물던 뉴욕의 한 호텔에서 여성 고객을 상대로 성추행을 저지른 일이 적발된 사실을 미국 조사팀에 털어놨다. 바토우티는 회사 측으로부터 해당 비행을 마지막으로 ‘미국 노선 제외’ 등의 징계를 받았으며, 이로 인해 “바토우티가 회사에 대한 복수심에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타하는 사고 발생 몇 달 뒤 영국으로 망명 신청을 했는데, 국영 항공사에 대한 폭로로 본국인 이집트에서 박해를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당시 LA타임스 등이 전했다.


이집트, 기체 결함 주장

그러나 이집트 정부는 ‘조종사 고의 추락’이라는 미국 측의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집트 민간항공국(ECAA)은 항공기 엘리베이터 제어 시스템 고장, 즉 기체 결함이 추락 원인이라는 결론을 내린 별도의 조사 보고서를 펴내고 “(사고 기종인) 보잉 767과 관련된 다른 사고에서도 같은 결함이 발견된 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집트 내에선 미국이 자국 기업인 보잉의 기체 결함을 인정하지 않고 배상을 회피하기 위해 이집트에 책임을 지우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이집트 당국은 바토우티가 자살 비행을 할 만한 동기가 없었다고 밝혔다. 바토우티의 기도문 “신께 맡긴다”에 대해선 “이집트에선 평상시에도 사용되는 기도문”이라고 평가했다. 아침 출근길 등 일상적이고 사소한 상황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이라는 얘기였다. 바토우티의 기도는 자살과 대량 학살을 기획한 사람의 마지막 기도가 아니라, 항공기를 구하기 위해 신의 개입을 간청하는 간절한 기도문이었을 거라는 설명도 내놨다. 이집트 언론 역시 “미국의 목표는 이집트항공 조종사를 비난해 진실을 숨기는 것”이라며 미 당국의 결론을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바토우티의 가족도 자살 비행 가능성에 고개를 저었다. 책임감 있는 가장이자 독실한 무슬림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선택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했다. 이슬람교에서 죄악으로 규정된 자살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게 가족의 이야기였다. 승진 실패와 정년퇴직도 불만을 갖기보다는 “가정에 더 충실할 수 있다”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딸의 질병 역시 미국에서 치료를 받아오는 등 낙담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의료진 설명까지 나왔다.


망망대해 속 묻힌 진실

결국 한 사건에 두 나라가 완전히 다른 해석을 내놓으면서 치열한 진실 공방이 벌어졌다. 하지만 논란이 과열될수록 의문과 비방, 확인되지 않은 의혹은 더 쌓여 갔다. 이로 인한 상처는 유가족들의 몫이 됐다.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 해변 공원에 세워진 추모비 앞에는 사망자 217명의 이름이 새겨진 벽돌이 깔려 있다. 사고 직후 실종자 가족들이 모여 당국의 구조 소식을 애태우며 기다렸던 곳이다. 영어, 아랍어, 프랑스어로 적힌 기념비 문구는 이렇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집트항공 990편의 진실은 지금도 대서양 망망대해에 묻혀 있다. 그러나 유가족들의 그리움은 25년 전 사고 당시부터 단 한순간도 사라지지 않았다.

조아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