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나 허벅지는 굵은 걸까 두꺼운 걸까. 두껍다고 말해도 상관없을까. 한국어 형용사 굵다/가늘다(팔다리, 손가락, 실, 줄 따위처럼 지름이 있는 원통형 물체나 모래나 쌀알 같은 알갱이, 빗방울, 물방울, 목소리)는 원래 두껍다/얇다(두께[평면과 평면 사이의 거리]가 있는 물체)와 구별되는데 이제 굵은 목소리 대신 두꺼운 목소리, 가는 팔뚝/다리 대신 얇은 팔뚝/다리 따위도 많이들 써서 마치 '두껍다/얇다'가 '굵다/가늘다'를 포괄하는 모양새처럼 됐다. 그나마 알갱이나 방울을 '두껍다/얇다'로 일컫는 이는 아직 드물다.
나는 비록 규범주의자가 아님에도 이런 오용은 지극히 꺼리는데 하도 자주 접해서 익숙해지기도 한다. 언어를 늘 다루는 작가, 편집자, 기자라도 틀리는 경우가 왕왕 보인다. 누구나 언어 감각이 조금씩은 다르니 널리 퍼진 오용을 적당히 받아들이는 이도 있을 테고, 살아 있는 표현을 넣고자 일부러 틀리게 썼으리라고 관대하게 봐주고도 싶다. 많이들 쓰긴 해도 여전히 오용으로 간주하고 웬만하면 고칠지 아니면 완전히 자리 잡은 변화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지는 더 지켜봐야겠다.
'굵다/가늘다, 두껍다/얇다'는 일본어(太い/細い, 厚い/薄い)와 중국어(粗/細, 厚/薄)도 구별한다. 이 두 언어는 여전히 한국어보다 엄격하게 둘을 가려서 쓰며, 이는 여러 기계번역에서도 잘 드러난다. 예컨대 영어 He has thick arms는 한국어로 '그는 팔이 굵다'라고 제대로 옮기기보다 '두껍다'로 틀리는 기계번역 결과가 더 많은 반면, 일본어나 중국어는 대개 맞게 나온다. 이런 오류를 교정하는 게 옳으냐를 떠나서 한국어의 현실태는 고스란히 반영하는 셈이다.
그런데 사람이 한 번역에서 '두꺼운 머리카락/털' 같은 표현을 보면 곱절로 난감하다. 일단 영어 thick/thin hair는 '숱이 많다/적다'를 뜻한다. 털이 '굵다/가늘다'는 coarse/fine을 쓴다. 따라서 thick hair를 '굵은 털/머리카락'이라 옮겨도 잘못인데 이걸 '두꺼운 털/머리카락'으로 옮기면 곱절로(한국어 표현 및 영어 뜻) 틀리는 셈이 된다. 머리카락이면 '숱진 머리카락/머리털'로 옮겨도 된다. '덥수룩한'은 헝클어진 느낌이라서 좀 다른데 적어도 '두꺼운 머리카락'보다는 낫다. thick fur를 '두꺼운 털'이라 옮겨도 역시 어색한데, fur는 '털가죽/모피'이므로 '두꺼운 털가죽'이 알맞다. '털'은 '털오리' 즉 '털의 가락'이니 '빽빽한 털'인 경우는 있겠다.
지금이야 이런 오용이 틀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아서 그나마 지적을 받아들이는 분위기이기는 하지만 앞으로는 어찌될지 모를 일이다. 말의 섬세한 쓰임이 사라진다면 아쉽기는 해도 누구나 생각이 같지는 않을 것이다. 언어는 퇴화보다는 변화의 관점에서 봐야 하고 미래는 그때의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이런 면에서는 언어 감각이 다소 보수적인 나는 앞으로도 '굵다/가늘다' 및 '두껍다/얇다'를 가려서 쓸 텐데 더더욱 골동품 취급을 받게 될 것도 같다.
번역을 틀린 챗봇에게 '굵다/두껍다'의 올바른 쓰임을 알려주자, 마치 원래부터 알았던 듯이 맞장구를 친다. 그런데 앞으로 인공지능이 머리가 굵어지면 남들 다 그렇게 쓰니까 괜히 시비 걸지 말고 국으로 가만히 있으라며 타박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