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증하는 ‘거절 살인’... 교제 폭력, 왜 죽어야만 끝날까
‘자신과의 교제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연인의 딸을 죽이고 연인까지 살해한 ‘강남 오피스텔 모녀 살인사건’의 가해자 박학선(65), 이별을 통보한 여자 친구를 죽이고 그의 어머니에게 상해를 가한 김레아(26), 흉악 범죄에 쓰였던 흉기를 검색해 3주 사귄 연인을 찔러 죽인 ‘하남 교제 살인 사건’의 가해자 A씨, 연인의 집에 무단침입해 잠자던 연인에게 무차별 폭행을 휘둘러 죽음에 이르게 한 ‘거제 교제 살인 사건’의 가해자 B씨, 갈등을 빚던 여자 친구를 건물 옥상으로 불러내 죽인 ‘의대생 교제 살인 사건’의 가해자 C씨에 이르기까지. 올해 언론에 보도되며 공분을 일으킨 교제 살인 사건 가해자들의 범행 동기는 모두 같았다. ‘거절당해서.’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24년 발간한 '교제폭력 피해의 특성과 대응을 위한 향후 과제'에 따르면, 가해자는 피해자를 통제하고 자신의 영향력 안에 가두어 둠으로써 관계의 우위에 서고자 하는 의지가 좌절될 때,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피해자를 살해한다. 상대방이 표한 거절 의사에 대한 분노가 범행의 주된 동력이었다는 점에서 최근엔 ‘거절 살인’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교제 폭력에서 비롯된 ‘거절 살인’의 수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지난해 언론에 보도된 사건을 기준으로 분석한 결과, 지난해 남편과 연인에게 살해된 여성은 최소 138명으로 집계됐다. 살인 미수에서 살아남은 여성까지 합하면 449명으로, 매일 한 명 이상의 여성이 친밀한 관계의 남성의 손에 죽거나 죽을 위기에 처한다. 피해자가 죽어야만 교제 폭력이 끝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죽음의 고리를 끊기 위해선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 교제 폭력을 연구해 온 전문가, 김효정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과 올해 언론을 통해 보도된 거절 살인 사건을 들여다보며 함께 짚어봤다. 김 연구위원은 ①교제 폭력을 젠더 구조의 문제가 아닌 ‘사적 영역 범죄’로 보는 관점부터 바꿔야 하며, ②피해자 스스로 빠져나오기 어려운 교제 폭력 범죄의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한 입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교제 폭력은 대개 ‘강압적 통제’로 시작된다. 가해자가 상대방을 손쉽게 휘두르기 위해 가장 먼저 취하는 전략은 피해자의 인간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김레아 사건이다. 지난 3월 여자 친구를 살해한 김레아는 평소 피해자가 가까운 동성 친구와 연락할 때도 자신이 통화 내용을 들을 수 있게끔 스피커폰 모드를 사용하게 했고, 나중에는 피해자가 자신을 제외한 타인에게 연락을 취할 수 없도록 휴대폰을 빼앗아 망가뜨렸다. “주변 사람에게 연락하면 그 즉시 죽여버리겠다”며 “요즘 청부살인 3,000만 원이면 된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김 연구위원은 “김레아 사례와 같은 수법은 많은 교제 폭력 가해자들이 피해자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피해자를 무력화하기 위해 쓰는 흔한 방법”이라며 “처음엔 애정 표현과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통제로 느끼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위험을 인지한 피해자가 저항하면 폭행을 가하거나, 피해자와의 성관계 영상을 촬영한 불법 촬영물을 통제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말에 복종하게 하기도 한다. 김레아 역시 피해자의 동의 없이 강제로 촬영한 불법 촬영 영상을 유포하겠다며 피해자의 카카오톡과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을 수시로 감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연구위원은 “일단 한 번 위계적인 관계가 형성되고 나면, 피해자는 심리적으로 완전히 무력화된다”며 “특히 가해자가 피해자의 불법 촬영물 등을 가지고 있는 경우, 보복이 두려워 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원치 않는 만남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가해자의 강압적 통제는 점차 피해자 본인에서 그 주변까지 확장된다. 피해자를 통제하기 위한 협박의 방식도 자살·자해 협박부터 주변인을 해치겠다는 협박, 스토킹이나 성범죄까지 다양하게 발전한다. 김 연구위원은 “이러한 가해자의 통제가 계속되면 피해자는 역설적이게도 가해자에게 종속적으로 의지하게 되면서, 가해자와의 관계를 끝낼 수 없다는 좌절감을 경험하게 되기도 한다”고 밝혔다. 참다못해 신고를 해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현행법상 교제 폭력 관련 처벌 규정이 따로 없기 때문에, 연인 간에 폭행·협박 등이 발생해 신고하면 형법에 따라 처리한다. 형법상 폭행, 협박은 ‘반의사불벌죄’이기 때문에 법망을 빠져나가는 경우가 대다수다. 지난 4월 발생한 ‘거제 교제 살인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피해자는 사망하기 1년 전부터 가해자를 11번이나 경찰에 신고했지만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 피해자의 어머니는 “딸이 경찰에 여러 번 신고했지만, 두 사람이 연인관계라는 이유로 ‘싸울 수도 있지’라는 식으로 아무 조치 없이 끝났고, 그럴수록 가해자의 태도는 더 의기양양해졌다”고 밝혔다. 당시 경찰은 번번이 피해자의 처벌 불원 의사에 따라 수사를 종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4월 4일 가해자 B씨는 여자 친구의 집에 침입해 잠을 자고 있던 피해자를 무차별 폭행했다. 피해자는 외상성 경막하출혈로 전치 6주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던 중 숨졌다. 교제 폭력에서 ‘반의사불벌조항’은 추가 범죄를 불러오는 화근이다. 가해자가 처벌을 받아도 문제고, 받지 않아도 문제다. 김 연구위원은 “피해자 처벌 불원으로 처벌을 받지 않으면 ‘계속해도 되는구나’ 하면서 폭력의 수위가 올라가고, 가해자가 처벌을 받으면 ‘피해자가 원해서 이렇게 됐다’며 보복 범죄를 실행한다”고 말했다. 경찰청 내부 자료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젠더 폭력 유형별 검거된 가해자가 구속된 비율은 가정폭력이 3.6%, 성폭력이 3.6%, 스토킹이 3.7%, 교제폭력이 1.8%에 불과했다. 교제 폭력의 가해자가 구속까지 이르는 비율은 다른 젠더 폭력 범죄와 비교해도 현저히 저조하다. 김 연구위원은 “상황이 이렇다 보니 피해자는 ‘신고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무기력을 학습하게 되고, 가해자는 ‘폭력을 더 휘둘러도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불감증을 강화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피해 사실을 눈치챈 피해자 주변인들은 “왜 당장 헤어지지 못하냐”며 피해자를 힐난하거나 “당장 신고하라”며 다그치기 일쑤다. 하지만 주변인이 이런 식으로 피해자의 상황에 개입하려 들면, 피해자가 느끼는 고립감은 한층 심화된다. 김 연구위원은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반복적인 좌절을 경험해 온 피해자에게 주변인들이 섣불리 이런 말을 얹게 되면, 피해자가 과하게 스스로를 탓하게 될 수 있다”며 “절대로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시키고, 언제든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교제 폭력 범죄를 제대로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은 수년째 반복적으로 제기돼 왔다. 하지만 윤석열 정권이 출범한 이후 여성 폭력에 대한 관심도는 급속도로 떨어졌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은 없다, 차별은 개개인의 문제"라는 관점을 공공연히 내비친 바 있다. 김 연구위원은 교제 폭력을 ‘젠더 기반 폭력’으로 정확하게 분류하고 이를 ‘구조적 문제’로 바라보는 관점이 문제 해결의 첫 단추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회 질서에 내재돼 있는 불평등한 젠더권력 관계야말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지속시키는 핵심 요소”라면서 “이런 전제를 무시하고 가해자의 폭력을 ‘개인의 일탈’로 보거나, 교제 폭력을 우연한 사건이나 개인이 경험하는 불행 정도로 축소해서는 문제의 본질을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현재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다루는 법은 가정폭력처벌법과 성폭력처벌법, 스토킹범죄처벌법이 전부다. 혼인·혈연관계 이외의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을 다루는 법령은 없다. 국회에선 관련 법안이 발의됐다 폐기되기를 반복했다. 21대 국회에선 1997년 제정된 이후 한 번도 전면 개정되지 않았던 가정폭력처벌법을 고쳐 ‘결혼하지 않은 연인 관계인 경우’도 처벌 대상에 포함하거나, ‘교제폭력처벌법’ 등을 신설하자는 방안이 제안됐다. 하지만 ‘어디까지를 ‘교제 관계’로 볼 것인지가 모호하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논의도 없이 발의된 법안이 모두 폐기됐다. 김 연구위원은 “교제 관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지 모호하다는 것은 결국 핑계에 불과하다”며 이것을 “의지의 문제”라고 봤다. “해외 법제들을 보면 관계 기간·관계 유형·경제적 결합 여부·상호적으로 얼마나 헌신했는가·주변에선 이 관계를 어떻게 정의하는가 등 여러 가지 기준에 따라 종합적으로 교제 관계를 정의하고 있다”며 “기준이 복잡하다고 ‘정의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은 철저히 사법 편의적 관점”이라고 강하게 지적했다. 교제 폭력이 거절 살인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많다 보니, 교제 폭력의 전조 증상에 해당하는 ‘강압적 통제’까지 법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지난 6월 상대를 정신적으로 압박하고 행동의 자유를 빼앗는 ‘강압적 통제 행위’를 규율할 입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담은 보고서를 내놨다. '강압적 통제 행위'란 ‘행방을 추적하고 감시하거나 타인과의 교류를 제한하는 등 피해자가 공포심을 느낄 정도로 정서적 학대를 가하는 것'을 이른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허민숙 입법조사관은 “상대를 통제의 대상으로 여기는 가해자의 특성은 결별 과정에서 피해자가 살해당할 수 있음을 예견할 수 있는 매우 뚜렷한 위험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이미 외국에선 신체적 폭력이 없어도 친밀한 관계에서의 통제 행위를 처벌하고 있다. 영국의 ‘중범죄법’,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가정폭력법’ 등이 대표적이다. 통제 범죄가 인정될 경우 영국과 아일랜드에서는 5년, 스코틀랜드에서는 최장 14년형에 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