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약 당첨에만 기대면 평생 집을 살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이참에 지금 전세로 살고 있는 아파트를 생애 최초 대출을 받아 샀습니다."
서울에 사는 직장인 황모(48)씨는 결혼한 지 18년 만에 내 집 마련에 성공했다. 애초 아파트 청약으로 새 아파트에 사는 게 목표였지만, 그 꿈을 접었다.
요즘 황씨처럼 청약을 포기하고 기존 헌 아파트 매수로 방향을 돌리는 중장년 '청포자'들이 적지 않다. 20대 직장 생활을 시작하며 청약통장을 만들었다고 가정하면 적어도 15년 이상 무주택자로 지내며 아파트 청약 당첨을 기다린 세대다.
이미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채웠는데도, 이들이 청약시장을 떠나는 것은 당첨을 기약할 수 없을 만큼 경쟁이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4050 사이에선 아파트 청약은 '희망 고문'이란 자조가 쏟아진다. 시장에선 그 배경으로 '특별공급'의 역설이란 지적이 나온다.
청약통장에 가입하는 이유는 단연 새 아파트를 분양받기 위해서다. 공공(국민)이나 민간(민영)이 짓는 새 아파트에 청약하려면 1순위 자격을 갖춰야 한다. 민영주택 기준으로 ①가입기간 1년(서울·수도권)·2년(투기·청약과열지역) ②지역별 예치금액(전용 85㎡ 이하 300만 원) 두 가지를 만족하면 된다.
어렵게 청약 자격을 갖추고도 청약 포기 행렬에 동참하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게 최근 추세다. 7월 말 기준 주택청약종합저축 1순위 가입자는 1,668만여 명으로 1년 전보다 47만여 명이나 줄었다. 2022년 11월(1,760만4,331명) 정점을 찍은 뒤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청약통장 고스펙이어도 새 아파트 당첨이 로또에 비견될 만큼 어려워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무엇보다 1순위 통장 가입자를 대상으로 배분하는 주택 물량이 크게 줄어든 탓이 크다. 역대 정부는 사회적 배려가 필요한 이들에게 청약 당첨 우선권을 주는, 이른바 '특별공급' 물량을 지속적으로 늘렸다.
현재 공공이 짓는 국민주택은 85%가 특별공급, 나머지 15%가 일반공급 물량이다. 민영주택은 공공택지에 들어선 경우엔 특별공급 비중이 58%, 민간택지라면 50%다. 원래 국민주택과 민영주택 특별공급 비중은 각각 80%와 43%였지만, 문재인 정부 때 지금 수준으로 확대됐다.
윤석열 정부에서도 마찬가지다. 특별공급 비중을 더 늘린 건 아니지만, 기존 물량을 쪼개 39세 미만의 미혼 청년을 위한 청년 특공, 혼인을 하지 않았더라도 입주자 모집 공고일 기준 2년 이내 임신·출산을 한 이들에게만 공공주택 청약 기회를 주는 신생아 특공을 새로 선보였다. 또 9억 원에 묶여 있던 특별공급 분양가 기준도 없앴다. 그 결과 서울 강남 고가 아파트에서도 특별공급 물량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찌 됐든 특공 전체 물량은 그대로니 괜찮은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1순위 통장으로 경합하는 물량은 크게 줄었다. 정부가 청약 경쟁력이 약한 청년층을 우대한다는 취지로 100% 추첨 물량을 크게 늘린 탓이다.
전용 85㎡ 이하(투기과열지구)는 가점제로 100% 당첨자를 뽑았는데, 2년 전부턴 59㎡ 이하는 추첨으로 60%, 60~85㎡ 이하는 추첨으로 30%를 뽑도록 했다. 공공아파트도 마찬가지다.일반공급은 원래 순차제 100%(저축총액 많은 순)로 당첨자를 뽑았지만, 현 정부 들어 일반공급 물량의 20%는 추첨제로 뽑는 방식으로 제도를 바꿨다.
이달 초 청약을 받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 디에이치 방배는 공급 물량이 1,244가구에 달해 시장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일반공급 규모는 650가구에 그친다. 나머지 594가구는 특별공급이다. 650가구 중 215가구는 무작위 추첨 물량이다. 결국 이렇게 남은 물량(435가구)을 가지고 1순위자들이 경쟁이 벌이는 구조다.
이렇다 보니 청약 경쟁이 치열했다. 10개 유형의 당첨자 최저 청약가점 평균은 70점이었다. 3인 가구가 받을 수 있는 청약 최고 점수가 64점, 4인 가구는 69점이다. 적어도 무주택 기간을 15년 이상 유지한 4인 가족은 돼야 예비 당첨이라도 기대할 수 있었던 셈이다.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59㎡B 타입은 당첨 최저 가점 69점 기준으로 청약통장 가입이 2002년인 이들이 당첨권에 들어간 것으로 분석된다. 2003년 청약통장에 가입한 69점 만점자는 예비 7번을 받은 것으로 파악됐다. 2006년 청약통장 가입자는 예비 당첨번호가 100번대 중반으로 밀려 사실상 당첨을 기대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시장에선 특별공급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무분별하게 대상을 늘린 탓에 기존 중장년 무주택자들이 역차별을 받게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디에이치 방배에서 신혼부부 특별공급으로 210가구가 공급됐다. 당첨 첫 번째 기준이 소득기준인데, 맞벌이 부부 기준 월평균 소득 120% 이하인 자다. 신혼부부 특공의 경우 전용 84㎡에 가장 많은 152가구가 배정됐다. 이 타입 분양가는 22억 원이 넘는다.
청약가점 경쟁은 치열하다 보니 위장전입 등으로 가구수를 늘리는 불법이 횡행하고, 특공은 결국 금수저 혜택 아니냐는 지적이 쏟아진다. 특공 유형이 여러 개 있지만 기능이 중복된다는 지적도 많다. 신혼부부 특공과 생애 최초 유형은 거의 비슷하다. 현 정부 들어선 청년층 혜택을 늘리면서 사실상 4050 특공 기회는 더 줄어든 측면도 있다. 결국 정공법(청약통장) 외 방법이 없는데, 이마저도 기회가 줄면서 청포자들이 쏟아지는 것이다.
40대들은 헌 아파트로 눈을 돌리고 있다. 법원 등기정보광장에 따르면 올해 1~8월 서울에서 생애 첫 아파트·오피스텔·다세대주택 등 집합건물을 구매한 40대는 7,638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5,312명)보다 43.79% 늘었다. "청약을 기다리다간 집값 상승 기회를 또 놓칠 것"이란 조바심이 주택 매수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청약저축 월납입 인정액을 기존 10만 원에서 25만 원으로 상향하는 정부 대책에 대해서도 비판 여론이 상당하다. 월납입 인정 한도 상향 영향으로 앞으로 청약통장 합격선이 대폭 올라갈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지금도 국민주택 일반공급 물량이 부족해 청약 경쟁이 치열하다. 매달 10만 원씩 10년 넘게 부은 이들이 당첨되는 현실을 고려하면, 앞으로 최소 합격선이 3,000만 원(25만 원×10년) 수준으로 올라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