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들만의 응급실

입력
2024.09.11 16: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십여 년 전 미국 연수 중 대학원생이던 현지인 친구에게서 들은 얘기는 충격적이었다. 당시 20대 후반이던 그는 살면서 단 한번도 병원을 이용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넉넉지 않았던 가정 형편상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감기 치료에만도 수백 달러가 드는 미국의 병원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단다. 그나마 대학에서는 학교 보건소라도 이용할 수 있어 다행이라 했다. 우리나라의 ‘전 국민 건강보험’이 자랑스럽고 고맙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국내에서 영리병원이 늘 뜨거운 감자였던 건 의료서비스 양극화 우려 때문이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무렵 정부는 투자개방형 의료법인 설립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의료서비스 질이 높아지면서 부유층의 국외 의료쇼핑이 줄어들 것”이라는 논리였다. 하지만 시민단체 저항을 넘지 못했다. “국민 건강보다 투자자 이익을 위해 병원을 운영할 것” “고급 의료서비스 개발에만 몰두해 의료비가 폭등할 것” 등의 주장이었다. 이후 제주 녹지국제병원이 국내 첫 영리병원으로 추진되다 끝내 무산되는 등 민심의 장벽은 여전히 굳건하다.

□ 의정 갈등으로 응급실 뺑뺑이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면서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 경증 환자의 응급실 이용 제한이다. 이번 추석 연휴부터 경증 환자가 대형병원 응급실을 이용하면 본인부담금이 60%에서 90%로 인상된다. 대형병원 응급실의 경우 생사를 다투는 중증∙응급환자 치료에 집중할 수 있도록 경증 환자는 동네 병원을 이용하라는 취지다. 실제 응급실 이용 환자 중 경증∙비응급 환자 비중이 절반에 가까운 42%에 달한다니 필요한 조치일 것이다.

□ 문제는 응급실 이용 양극화다. “열이 많이 나거나 배가 갑자기 아픈 것, 어디가 찢어져서 피가 많이 나는 것은 경증”이라는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의 발언은 국민 분노를 키웠다. 한밤중에 아이가 열이 펄펄 끓어도 대형병원 응급실을 찾았다가 경증 판정을 받아 치료비 덤터기를 쓸까 겁이 나는 서민들을 노린 발언 아닐까 싶을 정도다. 부담금이 60%든 90%든 부자들이야 큰 상관없을 테니까. 의료 최전선인 응급실이야말로 최하위계층에까지 열려 있어야 하는 곳이다. ‘부자들만의 응급실’이 되지 않을 보완책이 꼭 필요해 보이는 이유다.




이영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