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전쟁 같은 응급실의 밤… 교수 혼자 뇌졸중·대동맥박리 '초응급' 다 감당

입력
2024.09.1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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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안암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 현장]
서울 응급의료 거점인데 야간 당직의 1명
밀려오는 중환, 나홀로 처치 후 모니터링
"군의관 파견? 여긴 할 수 있는 의사 필요"


"환자분, 지금 좀 어떠세요? 여기가 어디예요?"

9일 오후 6시 25분. 김수진 고려대 안암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장은 이전 시간대 의료진으로부터 환자 현황 인수인계를 마치기가 바쁘게 막 들어온 80대 여성 환자 A씨 상태를 살펴야 했다. 통증 시작 시간부터 기저질환 유무를 세세히 물으며 진찰하던 그는 환자 염증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것을 발견하곤 즉시 컴퓨터단층촬영(CT) 검사를 받게 했다. 고령 환자라 자칫 위독한 상황으로 번질 수 있어서다. 김 센터장이 A씨 차트를 정리하려던 찰나, 바로 옆 병상으로 서너 명의 119 구급대원들이 급성 뇌졸중 의심을 받는 60대 남성 환자를 끌고 다급히 들어왔다. 김 센터장과 간호사들은 환자의 의식상태, 복용 약물, 좌우 반사 신경 등을 급히 파악한 뒤 피 검사와 뇌 CT, 자기공명영상(MRI) 검사를 위해 빠르게 이동시켰다.

추석 연휴를 1주일 앞둔 9일. 한국일보는 오후 3시부터 이튿날 새벽 3시까지 12시간 동안 서울 동북권 응급의료 거점인 성북구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 현장을 취재했다. 가까이서 지켜본 응급실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야간 당직의 1명이 6~8시간 동안 총 10여 명의 중증 응급환자를 도맡는 등 의료진들은 정신적·체력적 한계에 맞닥뜨린 모습이었다.

야간 응급실 의사 1명이 지킨다

권역응급의료센터는 서울에 7곳, 전국에 44곳뿐이다. 중증 응급환자를 전담해 '응급실의 응급실'이자 '응급환자들의 마지막 보루'로 불리지만 이곳도 위태롭긴 마찬가지였다.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에선 전공의가 떠난 뒤 남아 있는 응급의학과 교수 9명이 번갈아 당직을 서고 있다.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오전 8시까지 야간 상황에선 자정을 기점으로 한 번 교대가 이뤄질 뿐 이날 단 1명의 당직의가 응급실을 책임졌다. 의정갈등이 불거지기 전엔 5~9명이 맡던 일이다.

오후 6시부터 자정까지 응급실을 홀로 지켜야 하는 김수진 센터장은 6시간 동안 중증응급진료구역을 단 한 번도 벗어나지 못했다. 중증도 분류체계 레벨1(심정지), 레벨2(생명 혹은 사지, 신체기능에 잠재적 위협이 있어 빠른 치료가 필요한 경우) 환자를 16명 인수인계 받았고, 이후 30분마다 응급환자들이 계속 이송됐다. 수개월 전 항암 치료를 받았는데 갑작스레 섬망(급성 의식 혼란) 증상을 보이는 환자부터 의식불명으로 호흡이 저하돼 기도삽관이 필요한 환자가 연이어 들어왔다. 한 손으로는 이마를 짚은 채 차트를 정리하던 김 센터장은 쉰 목소리로 "정신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권역센터 몰리는 중증환자들

야간 상황은 더 급박했다. 중증도 레벨1, 2 환자가 90%를 차지했다. 대동맥 박리가 의심되는 50대 여성 환자에 이어 교통사고로 중증 외상을 입은 60대 남성 환자가 실려왔다. 전화로 진료 가능 병원을 찾아 헤매는 이른바 '뺑뺑이' 끝에 겨우 이곳을 찾은 환자도 있었다. 밤 9시 40분쯤 동대문구에서 이송된 50대 여성 폐 결절 환자의 보호자 한모(50)씨는 "1시간 넘게 전화로 병원 여러 곳을 수배한 뒤 올 수 있었다"면서 "'응급실 대란'이란 말이 이제야 실감난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새벽 시간대에도 '응급실의 시간'은 이어졌다. 자정 이후 진료를 넘겨 받은 이시진 응급의학과 교수 역시 기존 환자 상태를 수시로 모니터링하면서 신환(새로운 환자)을 받느라 숨 돌릴 틈이 없었다. 10일 새벽 1시쯤에는 위암 수술을 받던 70대 남성 환자가 장 유착 증상을 보여 노원구의 2차 병원에서 급히 옮겨졌다. 응급 수술이 필요해 외과 당직의가 있는 이곳으로 온 것이다. 30분 뒤 엔 온몸이 창백해진 채 경련 증상을 보이는 환자가 실려왔다. 이 교수는 심혈관 질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급히 정밀 검사에 나섰다.

"숫자 채우기 아닌 양질 의사 필요"

인력 부족을 절실히 체감하고 있는 의료진들은 지금 당장도 힘들지만 1주일 앞으로 다가온 추석이 더 큰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보통 연휴 기간 1, 2차 의료기관이 문을 닫으면서 평상시의 두 배 가량에 달하는 환자들이 찾기 때문이다. 김수진 센터장은 "추석 연휴에 새벽을 제외하곤 응급의학과 교수 2명을 일단 시간대마다 배치했다"면서도 "대비가 될지는 잘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정부가 군의관 파견 등을 대책이라고 내놓고 대통령은 "정부 안내에만 따르면 추석 연휴 기간 걱정 없이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홍보하는 것에 대해서도 현장 의료진들은 수치에 매몰돼 사태의 심각성을 간과하고 있다며 답답함을 감추지 못했다. 안암병원의 경우 의정갈등이 불거진 뒤 공중보건의와 군의관을 받았지만, 수련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이들에게 환자를 맡길 수 없어 모두 돌려 보냈다. 김 센터장은 "지금 응급실에 필요한 건 중증환자를 볼 수 있는 양질의 의사"라며 "단순히 빠진 수만큼 메워주겠다는 것은 해결책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시진 교수도 "가용 병상 수가 남았다고 해도 협진을 할 수 있는 필수과 의료인력이 없다"면서 "응급실에서 환자를 받을 수 있는 역량이 확연히 줄었다는 의미"라고 짚었다.

김태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