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노동자가 신뢰하는 철도 안전시스템

입력
2024.09.1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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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던 아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그저 재수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부주의했기 때문일까? 도로에 싱크홀이 발생하여 운전자가 빠졌다. 단순히 운전자의 부주의 탓일까, 아니면 불운 때문일까?

현대사회는 위험사회로 불린다. 위험은 갈수록 고도화되고 있으며, 개인이 모든 위험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차를 타는 승객은 열차의 모든 시스템이 안전한지 일일이 확인하지 않는다. 대신, 철도공사를 믿고 열차에 몸을 싣는다. 철도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주변을 확인하지만, 모든 위험요소를 확인할 수는 없다. 철도의 중층적인 안전시스템을 믿고 일을 나설 뿐이다.

지난 달 구로역에서 철도노동자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야간에, 안전하다고 믿었던 그 공간에서 발생한 추돌사고였다. 사고 후 철도공사는 인접선 차단까지 협의하고 승인 구간 내에서 작업하라는 지침을 냈다. 도로의 운전자에게 앞으로 싱크홀 유무를 확인하고 운행하라는 이야기와 같다.

우리가 믿었던 철도 안전시스템이 철도노동자를 배신하고 있다. KTX 개통 이후 20년 동안 철도는 더욱 빨라지고, 첨단화했으며, 철도 선진국 TOP 5 평균보다 높은 안전도를 확보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작업자의 안전은 그만큼 향상되지 못했다. 지난 20년 동안 매년 평균 2명의 철도노동자가 사망했다.

2018년 강릉선 탈선 사고 이후 작업자의 책임이 더욱 강화됐다. 안전지도사는 현장을 수시로 드나들며 작업자들의 행동을 지적하고, 규정 미준수에 대해 징계를 내린다. 현장의 불만도 쌓인다. 왜 지적에만 그치고, 근본적인 개선은 이뤄지지 않느냐는 것이다. 실적을 쌓기 위해서인지, 진정으로 안전을 강화하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푸념도 들린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위험이 보고되지 않는다. 실수로 발생할 뻔한 사고나 목숨을 잃을 뻔한 '아차사고'조차 보고되지 않고, 퇴근 후 술자리에서만 얘기된다. 하인리히 법칙이 말하는 사소한 실수와 전조 증상은 모두 사라지고 만다. 감시와 처벌 위주의 정책으로는 현장의 실수와 아차사고가 주는 교훈을 얻을 수 없다.

철도 노동자가 철도 안전시스템을 신뢰하려면,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우선,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한 실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안전한 작업환경을 위해 여러 개의 절차가 필요하고, 안전규정이 존재한다. 하지만 인적오류, 잠재적 위험이 상존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묵살한 채 모든 것을 작업자에게 떠넘겨 버릴수록 안전시스템 구축을 위한 현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다.

다음으로 구조적으로 안전한 작업환경을 만들어내야 한다. 작업선 좌우에서 열차가 운행한다는 것은 위험이 상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업자의 안전과 열차운행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에 직면한다. 철도공사는 작년과 올해 폭우로 일부 노선의 운행을 중단했다. 철도노동자의 생명을 우선으로 생각한다면 일부 노선의 운행이 지연되더라도 안전한 작업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자에게 위험을 멈출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 안전시스템이 붕괴된 경우, 현장의 노동자는 도망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 컨베이어벨트나 위험설비의 비상정지 버튼처럼 선로의 노동자가 열차추돌의 위험을 느낄 때 열차를 멈출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이미 관련한 장치는 개발돼 있다.

철도공사는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최우선으로 집중해야 한다. 철도 안전시스템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인접선 차단과 같은 근본적인 안전 대책이 마련돼야 하며,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한 실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노동자들이 생명을 담보로 일하지 않도록, 철도공사와 국토부는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이근조 전국철도노동조합 정책실장